"노숙 청산후 겨우 정착…암 선고 청천벽력"
"이제 겨우 사람처럼 산다 싶었는데…."
최학조(62·경북 김천시 지좌동)씨는 한때 노숙자로 역에서 잠을 청하기도 할 정도로 힘든 밑바닥 삶을 살았다. 그러다 겨우 자리를 잡고 정착한 것이 6년 전, 기초생활수급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작은 방 한 칸도 마련했고 4년 전에는 부인도 얻었다. 아내는 지적장애 3급이었지만 그래도 평생 홀로 지내온 인생에 함께할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혈변이 나오기 시작했다. 몸에 탈이 났다고는 생각했지만 돈 걱정에 병원을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수급비 60만원으로는 10만원 월세와 각종 공과금을 내고 나면 아내와 밥을 먹고 살기 빠듯한 금액이었다. 결국 친구 손에 끌려 병원을 찾게 됐다. 친구는 "나라에서 무료 검진을 해 주니 건강검진을 받아보자"며 최씨의 손을 끌고 병원으로 향했고, 이날 내시경 결과 내려진 진단은 대장암 2기였다.
병원비 걱정에 치료를 포기할까 생각했었지만 친구는 또다시 최씨의 등을 떠밀었다. "300만원을 빌려줄테니 나중에 낫고 나서 능력이 될 때 갚으라"며 "대구의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것이 7월 초의 일이다.
최씨는 현재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 병원 측에서는 "그나마 빨리 발견해 치료 가능성이 높지만 적어도 6개월 이상의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최씨가 병원에 머무르면서 그러잖아도 정신을 놓기 일쑤인 아내는 좀 더 상태가 악화됐다. 친구에게 부탁해 밥이라도 챙겨달라고 했지만 아내는 아무 사람이나 붙들고 욕을 해대며 남편을 찾는다. 최씨는 "여기저기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할 뿐"이라며 "구미 해평에 있는 처가에 데려다 놓을까 생각도 했지만 거기는 잘 가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최씨가 본래 혼자였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도 있었고, 형도 있었다. 최씨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밥벌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용접 기술을 배웠다. 불꽃이 튀는 모습이 마냥 신기해 당시 월급 300원을 받고 기술만 가르쳐달라고 애원해 용접 기술자가 됐고, 그 기술로 20년 가량을 먹고 살았다. 처음에는 김천에서 일을 시작했다가 대구, 서울로 옮겨가며 일을 했다. 최씨는 "어머니는 결혼한 형보다는 나와 함께 살고 싶어했고, 어머니 모시느라 혼기마저 훌쩍 넘겼다"고 했다.
그러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서서히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용접일을 하면서 워낙 강한 불빛에 노출되다보니 시력을 잃기 시작했고, 허리디스크까지 오면서 일을 그만둬야 했다. 처음에는 안타까워하던 어머니도 멀쩡했던 아들이 일을 못하고 몇 년째 백수생활만 계속하자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어머니는 홀로 고향 김천으로 돌아갔고, 이후로는 어머니와 형을 만나지 못했다. 최씨는 "처음에는 미운 마음에 만나러 갈 생각을 못했고, 그 다음에는 미안함이 앞서 가질 못했다"며 "10여년 전 기억을 더듬어 형이 살던 집을 찾아가봤지만 이사를 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최씨는 "돈 생각만 하면 눈물부터 솟구친다"고 했다.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모형제를 떠나와 밥을 굶는 날도 부지기수였고, 한뎃잠을 청한 날도 무수히 많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월세 10만원짜리 단칸방인데 아내와 두 사람이 누우면 공간이 거의 꽉 차는 작은 방이다. 동네 사람들이 헌 장농을 가져다줬지만 들여놓을 공간이 없어 밖에 두고 쓸 정도다. 그래도 최씨는 "정착하고 살 곳이 있어 행복했다"며 "15년 떠돌이 생활 끝에 맛본 사람다운 삶을 이제와서 병으로 포기하긴 싫다"며 굵게 주름 팬 얼굴 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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