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오늘, 갓 쓰고 도포를 입은 늙은 유생이 대한해협을 건너고 있었다.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에 패해 쓰시마섬으로 유형을 떠나는 勉菴(면암) 崔益鉉(최익현)이었다. 74세의 노구였지만 일본군 앞에서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평생 3차례 섬으로 끌려갔다. 1871년 서슬퍼런 대원군의 실책을 비판하는 상소로 제주도로 3년간 귀양을 갔고, 1876년 도끼를 들고 일본과의 통상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로 3년간 흑산도에 유배됐다. 결국 적국의 땅에서 단식끝에 그해 11월 사망했다.
고루하고 편협한 유학자가 아니었다. 조선 말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일부에서는 '세계정세를 읽지 못한 보수꼴통'이라 평가절하하나 그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이다. 그만큼 강건한 기개와 용기를 보여준 이는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 말로 하면 나라와 민족정신을 지키려한 진정한 '보수'다.
그가 1906년 2월 의병을 일으키면서 지은 격문이다. "오랑캐의 화란이 어느 나라에 없었으리마는 어디에 오늘날의 왜적 같은 자가 있는가…우리 의병의 올바름을 믿고, 적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에 격문을 돌리니 도와 일어나라."
박병선 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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