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합니다! 평생 얘깃거리 군대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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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체육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귀분(대구 중구 남산3동)
다음 주 글감은 '외갓집'입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최고 경쟁률 뚫고 여군의 길로
어느 날 우연히 '여군의 길'이라는 글을 읽었고 어렸을 적부터 동경해오던 군복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시험에 도전했었다. 두 번째 도전에서 여군 역사상 최고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자 명단에서 '이은주'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육군훈련소를 시작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군들과 함께 20㎏이 넘는 완전군장에 뜀걸음, 산악구보, 폭설을 맞으며 받은 유격 훈련 등을 통해 나는 여자가 아닌 군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임관선서를 하고 야전부대로 전입 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최고를 만들 것이다'라는 말처럼 이유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였다. 때로는 넘치는 의욕이 화를 불러오는 경우도 있었고 책상 위에서 지쳐 잠든 적도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받는 유격훈련, 영하 20도 이하의 혹한 상황 속의 훈련들. 그때마다 나를 일으켜 준 건 방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게 적어놓은 나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겐 너무나 큰 시련이 닥쳐왔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 며칠을 의미 없이 멍하니 보냈다.
퇴근길에 시장에 들러 장을 보는데 한 여자 아이가 나를 보며 "엄마, 나도 저 언니처럼 멋진 군인이 될 거야" 하였다. 엄마는 "그래. 열심히 하면 언니처럼 멋있는 군인이 될 수 있어" 하며 모녀가 방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마음의 실망은 사라지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군인의 본분을 잊은 채 멍하게 지내던 나에게 어린아이는 따끔한 충고를 해주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닥친 작은 시련으로 좌절하지만 항상 어두운 먹구름이 지나고 나면 밝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나에게는 목표가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일찌감치 나의 아침을 준비한다.
이은주(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중사)
♥머리 미는 순간 진짜 군인이란 생각
2006년 2월 모두들 독일 월드컵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난 군대에 입대했다. 부모님과 동행한 나는 부모님을 향해 "충성"이라는 큰 소리로 경례를 하고 훈련소에 입소했다. 아버지께서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셨다고 하던데 아직도 그 얘기를 들으면 마음이 찡하다. 역시 부모님들의 마음은 똑같은 것 같다. 부모님을 보내고 훈련소에서도 아직 군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막상 사복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빡빡 미는 순간 이젠 진짜 군인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빡빡머리로 훈련을 받고 어느덧 5주라는 시간이 흘러 강원도 철원에 자대 배치 받게 되었다. 철원에서의 군생활의 시작. 고참들은 첫날 나를 위해 조그만 회식을 마련해 주었는데 신병 때 회식은 정말 힘들었다. 개인기도 없는 나인데 회식 때마다 분위기를 띄우려고 고생한 걸 생각하면…. 그때 참 많은 개인기를 배운 것 같다. 드디어 나도 첫 휴가를 나왔다. 집으로 돌아와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밖에 나가면 내가 군인인 줄 잘 모를 거야 하고 생각했는데 군인은 역시 군인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카페에서 나올 때 일하는 분에게 "수고하십시오" 하고 군대식 말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친구들은 역시 군인이라고 하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첫 휴가가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는데 왜 군인들이 탈영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나도 정말 부대에 복귀하기 싫었다.
이제는 전역하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입대할 당시 군대에서의 2년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에게 많은 추억과 소중한 사람과 많은 걸 가르쳐준 2년이다. 가끔씩 그 2년이 그립기도 하다.
천용철(대구 동구 신암5동)
♥영화보고 감동 덜컥 해병대 지원
1973년 3월 어느 날,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를 보고 장동휘, 독고성, 이대엽, 황해 등의 액션 배우들이 정말 멋지다 생각했었다.
그 다음날 경상감영공원 앞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는데 병무청 담에 붙어있던 '해병대 모집' 안내문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해병대가 뭔지, 뭐 하는 군대인지도 모르고 단순히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라는 그 한편의 영화 때문에 해병대에 지원해 버렸다.
그 당시 옆에 같이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셋이서. 영문도 모르면서 내가 간다니까 두 명의 친구도 같이 지원했다. 그러나 막상 입대한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한 친구는 1차 신체 검사에서 떨어졌고 또 한 친구는 진해교육기지까지 가서 정밀신체검사에서 떨어져 입대 4일 만에 집으로 가버렸고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반짇고리, 수건, 칫솔, 치약 등을 나에게 내밀던 친구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길로 가게 된 해병대(해병 262기)는 정말 힘들었다. 나는 당시 훈련병들 중에 제일 적은 19세로 '돌아오지 않는 해병' 때문에 해병대에 가게 되었고 힘들어 엄청나게 울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병대에 다녀온 걸 자랑스러워한다. 그 긍지로 아들도 해병대(해병 865기)에 보내 무사히 제대했다.
박병규(대구 중구 동성로 2가)
♥8월 대구 뙤약볕 아래서 '찜통훈련'
해마다 여름이 되면 1994년 8월의 뙤약볕이 생각난다. 나는 94년 7월 구 50사단 훈련소 출신으로, 18개월 보충역으로 소집 해제했다.(소위 '방위'다) 남들 들으면 웃을지 몰라도 후방치고는 다양한 군 경험을 했다.
시작부터 심상찮았다. 내가 입대한 해는 대구가 50년 만에 가장 무더웠다는 때였다. 연병장 한가운데 온도계를 놓고 훈련을 받았는데, 빨간 점이 50도에서 펄떡 펄떡 뛰었다. 30, 40명의 훈련병이 잠을 자는 막사 안에는 선풍기가 단 두 대뿐이었다. 양철 지붕으로 만든 종교시설 안에서 수백 명이 붙어 앉아 설교를 들을 적에는 사우나도 이런 사우나가 없지 싶었다.
나는 행정병이라는 본분에도 불구하고 훈련도 많이 받았다. 사단 ATT(군사훈련)에 2, 3번 차출됐고, 유격 훈련에 혹한기 훈련까지 받았다. 혹한기 훈련 때는 야산에서 땅을 반쯤 파고 텐트를 친 뒤에 침낭을 덮고 5명이 잤다. 겨울 산이 그렇게 추운 줄은 그때 알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PRI(사격 훈련)를 받았다. 특전사 출신의 장교는 후방 부대원도 철저한 훈련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는 PRI를 '피 나고, 알 배기고, 이가 갈린다'며 우스개로 불렀지만, 여간 힘들지 않았다. 실제 사격 훈련은 더했다. '멀가중 멀가중 멀중가중', 지금도 안 잊어버린다. 사격이 변변찮으면 M16 소총을 거꾸로 머리에 세우고, 오리걸음으로 사격장을 돌았다. 정말, '히떡' 자빠지는 줄 알았다.
ATT 준비를 해야 한다며 채근하는 통에 태권도 단증까지 땄다. 다리를 찢느라 생긴 사타구니 피멍이 한 달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소총에 대검 꽂고 밤을 새워 가며 연무선(총검술)도 익혔다.(나는 나중에 현역 다녀온 한 친구가 '연무선'이란 단어를 처음 듣는다는 말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게 소중한 경험이었고, 소중한 시절이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고생했지만 보람있었다'며 힘을 얻곤 한다.
김진수(대구 서구 비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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