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정현주의 휴먼토크]1박2일 벙커

입력 2009-08-13 14:11:58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지옥과 천당을 경험하면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주말에 학회가 있어 외래진료를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서울행 열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플랫폼에는 휴가철을 맞아 즐거운 표정의 행락객으로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했다. 나 역시 목적은 달랐지만 일상을 일탈한 여행으로 조금은 여유롭고 이완된 발걸음으로 역 구내에 들어서는 순간 여동생으로부터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바닸다. 제부가 흉통이 심해 종합병원 응급실에 와있단다. 응급실이란 곳이 그러하듯 두서도 없는데다 제부는 통증으로 고통스러워 하는데 진료도 못 받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며 울먹인다.

예정된 일정이라 취소도 못하고 남편에게 일 처리를 부탁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서울로 향했다. 응급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시간 중계처럼 이어지는데 늑막에 물이 차 있고 가슴에 2cm 정도의 혹이 보이는데 암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사 소견이 최종 상황으로 알려져 왔다. 지금은 주말이라 정밀진단이 어렵고 월요일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더 전문적으로 CT 필름을 판독하면 윤곽이 드러난다고 하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건성으로 일정을 마치고 병원으로 향하니 친정 모친, 사돈댁 친척까지 모여 있고 병실은 초상집처럼 침울하기만 했다.

제부는 아이들에게 "아빠가 아파서 미안하다"는 속절없는 말로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하려 해보지만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아이들이 애처롭기만 하다. 사돈어른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제부를 향해 지청구를 해댄다. "아비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더라. 이제는 담배 끊고, 근처도 가지 마라. 회사일이 바빠도 시간 내서 규칙적으로 운동해라"는 등등.

나도 근거없이 무책임한 위로를 몇 마디 해본다. "별일 아닐 겁니다. 암이라면 체중도 줄고 식욕도 없는데 김서방은 여전히 체중이 늘고 식욕도 왕성하잖아요. 하나님이 이 기회에 담배 끊고 운동하라고 경고 주신 것일겁니다." 하지만 누구도 마지막 한마디 '암이면 어쩌냐?'는 걱정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속앓이만 했다. 고등학생'중학생 자녀들에 전업주부인 아내를 가진 평범한 대한민국 중산층 월급쟁이 남편이 암이란 진단을 받으면 그 다음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밤새 온 가족이 뒤척이며 악몽 같은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CT촬영 및 기관지경으로 시행한 정밀검사 결과 폐렴으로 진단받으며 암 해프닝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렇듯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끊임없이 잔디가 펼쳐진 페어웨이 뒤에 숨겨진 러프나 심지어 모래구덩이 벙커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무사히 러프나 벙커를 지나온 것을 감사하지 않고 오아시스가 없다고 낙망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이다. 암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지새운 1박 2일의 벙커 속을 기억한다면 평온한 일상을 무미건조하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짧은 러프를 힘들다고 불만하지 않으리라. 이런 작은 경고를 통해 우리를 긴장시켜 주심이 감사하고 그저 받은 건강이 감사하고 심지어는 살아있음이 감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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