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2만호 특집] 대구경북 사람 '기쁨과 애환' 고스란히…

입력 2009-08-04 07:00:00

每日新聞 지난호를 펼쳤더니…

1955년 7월. 대구신천에서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물놀이에 여념이 없다. 당시 신천은 거대한 빨래터였다. 매일신문 자료 사진
1955년 7월. 대구신천에서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물놀이에 여념이 없다. 당시 신천은 거대한 빨래터였다. 매일신문 자료 사진
1970년대 동산호텔에서 반월당 방향의 도심모습. 왼쪽 앞 빌딩은 옛 고려예식장으로 2009년 현재는 신성미소시티가 들어서 있다.
1970년대 동산호텔에서 반월당 방향의 도심모습. 왼쪽 앞 빌딩은 옛 고려예식장으로 2009년 현재는 신성미소시티가 들어서 있다.

1946년 창간 이래 지령 2만호를 맞기까지 매일신문의 취재대상도 많이 변했다. 매일신문이 취재하고 관심을 가진 기사의 변천은 곧 대구·경북, 나아가 한국 사회의 '관심사' 변천을 의미한다. 지령 2만호를 맞은 매일신문의 어제를 살펴보는 것은 결국, 대구·경북의 어제를 되짚어보는 작업이라고 할만하다.

◆해방 이후 격동기 굵직굵직한 뉴스 많아

매일신문은 1946년 3월 1일 '남선경제신문'(南鮮經濟新聞)으로 창간했으며 1950년 8월 1일 '대구매일신문'(大邱每日新聞)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1960년 7월 7일 제호에서 '대구' 두 자를 뺀 '매일신문'(每日新聞)으로 변경했다.

창간호는 2면으로 구성됐으며 기사는 조사를 빼면 거의 한문이었다. 지면 구성 역시 지금처럼 종합,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여론 등이 아니라 지면 구분 없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기사를 중심으로 썼다.

창간호 1면은 '창간사'를 필두로 지금은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얄타 협정'을 다루고 있다. 당시 미국 외무장관이었던 반즈씨의 말을 인용, 만주에 있는 일본군의 중공업기계 반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해방직후인 만큼 패전한 일본군의 장비와 기계, 공장 등의 처분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창간호는 또 '대구에서 서울까지 트럭 한 대 운임이 1만원이고, 부산까지는 6천원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 화폐 개혁이 이어져 이 액수가 지금 얼마쯤에 해당하는지 명확하게 환산하기는 어렵다. 이 기사는 '물가'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었다. '사고파는 것, 물류비용 등은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변하는 것이니 그런 문제에 간섭하지 말고 생산성을 높이고 기업 활동에 전념하자'는 기사였다. 1946년 창간된 남선경제신문이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입장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건국 초기였던 만큼 농업에 관심이 많았다. 창간호 기사는 '건국 노선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는 말할 것도 없이 식량 해결이 큰 이바지가 될 것이다. 쌀 문제도 문제이거니와 보리 생산이 걱정'이라고 쓰고 있다.

◆대구에 일반인 대상 버스 운행은 1946년

지령 100호를 맞은 1946년 7월 27일 지면은 국제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미국의 중국(지금의 타이완) 직접 원조는 중공군(지금의 중국)의 분란을 조장할 뿐'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타국의 간섭이 없으면 중국은 자립할 수 있는 만큼 미국이 중국에 직접 원조하여 중공을 자극하지 말라는 기사다.

이날 신문은 또 '30만 대구부민이 크게 희망하고 있는 서민의 발, 버스가 8월 1일부터 운행할 것'이라는 예고 기사를 싣고 있다. 기사는 이 버스가 우리나라 기술로 '개수(改修)'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 우리나라에 '자가용'시대가 열렸다고 본다면, 대구에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가 운행된 지 40년이 지나 이동수단에 커다란 변화가 온 셈이다. '자가용 시대'에서 20년이 지난 요즘 한국은 '마이카 시대'라고 할만하다. 앞으로 20년 뒤에는 어떤 교통수단이 이동과 운송의 중심 역할을 할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지령 1천호를 맞은 1948년 8월 24일자 신문은 '미싱 전문 인력 부족'을 언급하고 있다. 당시는 재봉틀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재봉틀을 다룰 줄 아는 인력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또 당시 신문 1면은 '노모 치사사건'을 다루고 있다. 존속 상해나 치사는 지금도 몹쓸 죄이지만 당시 신문 1면에 비교적 큰 제목을 달아 다룬 점을 고려할 때 '존속 상해나 치사'가 지금보다 훨씬 충격적으로 와 닿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불경기' 걱정

창간호 발행으로부터 15년이 흐른 1961년 2월 13일 매일신문은 5천호를 발행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늘 '불경기, 불경기'를 타박했던 모양이다. 설을 앞두고 있지만 '매기(買氣) 없는 제례장, 평시 같은 단대목 시장, 건어물· 육류 가게 스치는 손님이 대부분' 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띈다. 명절 앞뒤로 강력 범죄 역시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식도(食刀)든 강도 검거' 기사는 불경기 시장풍경 기사의 아래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이날 매일신문엔 몇 가지 광고가 눈에 띈다. 특별한 산업이 없던 시절이라 광고는 대부분 개인 사업자 중심이었다. 대구시 동성로 1가 10번지에 위치한 '뉴욕 제과'는 '여러분의 휴식처와 사교장'이라는 광고 카피와 함께 구정 선물용으로 고급 양과와 각종 카스테라를 소개하고 있다. 또 '일본 나쇼날 라듸오 한국 대리점'인 '미광당'을 홍보하는 광고도 큼지막하게 게재했다.

강력 구충제 '디게시나'는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먹자'는 광고 카피와 함께 웃는 얼굴의 5인 가족 얼굴 그림을 함께 게재했다. 당시엔 자녀가 최소 셋 이상이었을까. 아버지와 어머니 얼굴 뒤로 세 자녀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1970년대엔 영수증 주고받기 운동

지령 1만호를 기록한 1977년 1월 9일자 신문은 한결 세련된 맛을 풍긴다. 제목도, 기사도, 레이아웃도 안정감이 있다. 매일신문 지령 1만호를 축하하며 1면에 실은 '세계로 약진하는 대한중석' 광고는 대구가 산업도시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지령 5천호 시절의 카스테라 광고, 라디오 대리점 광고와 비교해 볼 때 산업규모가 상당히 커졌음을 보여준다. 대청 다목적 댐 공사 착공식 기사도 눈에 띈다. 대청 다목적 댐은 1977년 모두 788억원을 투입, 1979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에 착수했다. '달력 모델이 꿈' 이라는 19세 초보 모델의 사진도 실렸다.

자녀 교육비는 예나 지금이나 부모의 근심거리였다.

'교육비 감당 너무 힘들다'는 시리즈는 당시에도 이미 교육비로 부모들 등허리가 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장학금 제도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학업에 도움 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고 지적하고 있다.

매일신문은 일찍이 문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출신 작가들을 초대, '문화경북을 어떻게 꽃피울 것인가'를 주제로 좌담회를 열었다. 지금 대구의 최고 원로층에 속하는 도광의 시인을 비롯해 사진 작가 박원석씨, 이재행 시인 등이 참석 '예술을 경시하는 문화를 부끄러워하며, 작가와 대중, 매체가 한 덩어리가 돼 문화 경북(당시는 대구와 경북이 분리되지 않았다)을 꽃피우자'고 입을 모으고 있다.

요즘은 신용카드를 받지 않는 업소를 단속, 징계한다. 1977년 당시엔 신용카드 사용 운동이 아니라 영수증 주고받기 운동을 펼쳤다. 국세청은 1월 한 달 동안 영수증 주고받기를 권장하고 2월부터는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요즘 신용카드 사용을 권장하는 것이 원활한 세금 추징을 위한 것처럼 당시 영수증 권고 역시 세금을 정확하게 부과하기 위한 조치였다.

◆동성로 노점상은 20년 전에도 골치

지금부터 20년 전인 1989년 7월 12일, 음란비디오를 상습적으로 방영한 여관 주인 4명이 구속됐다. 이들 여관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음란비디오를 방영하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중장년층의 추억 속에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요즘은 개인의 명예훼손 가능성을 고려해 범죄 피의자라 할지라도 실명을 쓰는 대신 성씨를 밝히는 정도다. 초상권, 저작권 등에 대한 규제도 강하다. 그러나 당시 신문은 음란 비디오를 방영한 여관의 이름과 주소는 물론, 주인의 이름과 나이까지 싣고 있다.

한편 2009년 현재 동성로는 노점상이 철거되고 사람들이 걷거나 쉬는 거리가 됐다. 대구 중구청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다. 1989년 당시에도 동성로 노점상은 골치였다. 쫓아내도 끊임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노점상을 몰아내기 위해 대구시는 '동성로에 자동차 통행까지 검토'했다. 당시 이미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노점상 문제는 그만큼 골치였다. 결국 자동차 통행은 보류됐고, 강제 철거와 꽃거리 조성 등이 이어졌다. 이후에도 철거와 점령은 거듭됐고 최근까지 동성로는 노점상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매일신문 지령 2만호를 살펴볼 때 '사람살이의 관성'은 여전했다. 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 좀 더 밝은 사회이기를 바라는 마음, 문화의 향기가 흐르는 고장이기를 바라는 마음, 이웃을 돌보고 싶어하는 마음, 좀 더 안전한 세상을 원하는 마음 등이 그랬다. 변한 것들도 많았다. 입는 옷, 자주 먹는 음식, 가보고 싶은 곳이 바뀌었다. 하루 세끼 밥걱정은 줄어든 대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즐기려는 욕구는 강해졌다. 세월 따라, 기술 발전 정도에 따라 취미와 기호가 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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