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 예술 산책] 토드 헤인즈 감독-아임 낫 데어

입력 2009-08-01 07:00:00

'사람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봐야 비로소 참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포탄이 휩쓸고 지나가야 더 이상 사용되는 일이 없어질까/ 친구, 그 해답은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있어/ 바람만이 그 해답을 알고 있지.'

밥 딜런(1941~ )의 명곡 '블로잉 인 더 윈드(Blowing in the wind)'의 가사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야 다른 사람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간이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덧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깨닫지 못하는 이는 영원히 자기 속에 갇혀 지낸다. 바람은 깨달음의 메타포이다.

밥 딜런은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반전(反戰) 저항 운동의 상징이자 음유시인이다. 아이의 옹알이같이 흥얼거리는 그의 노래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무것도 없으면, 잃을 것도 없다(When you got nothing, you got nothing to lose)'도 그렇다. 노래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의 가사다.

밥 딜런의 노래 가사는 미국 법원 판결에 가장 많이 인용된다고 한다. '구르는 돌처럼'의 이 문구도 지난해 미국 연방 대법원 판결문에 인용돼 화제를 모았다. 통신업자들 간의 소송에서 "피고가 이익을 취한 것이 없기 때문에 원고에게 물어줄 것도 없다"는 의미로 이 가사를 끌어 썼다.

1981년 캘리포니아 법원에서는 꼭 전문가의 증언이 필요한가 라는 논란에서 '바람이 부는 방향을 알기 위해, 일기예보 아나운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역시 딜런의 노래 '지하실에서 젖는 향수'(Subterranean Homesick Blues)에 나오는 가사다.

밥 딜런의 노래는 이제까지 26회로 미 법원 판결에 가장 많이 인용됐다고 한다. 그만큼 가사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밥 딜런의 전기 영화가 지난해 개봉됐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아임 낫 데어'(2008년)다. '나는 거기에 없었다'(I'm not there)는 제목인데 't'만 없애면 '나는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있는 듯, 없는 듯, 그 또한 시적인 은유를 담고 있다.

전기 영화면서 정작 주인공인 밥 딜런이 나오지 않는 희한한 영화다. 정확히 말하면 밥 딜런이란 이름의 캐릭터가 없다는 것이다. 7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모두 밥 딜런의 자아가 투영된 인물이고, 이들을 모두 조합하면 밥 딜런이란 인물이 그려지는 식이다.

음악적 변신으로 비난 받는 뮤지션 '쥬드'(케이트 블란챗), 저항 음악으로 사랑받는 포크 가수 '잭'(크리스찬 베일), 가스펠 가수 '존'(크리스찬 베일)이 대중에게 주목받는 뮤지션으로서의 밥 딜런의 실제 삶을 보여준다. 뮤지션뿐 아니라 밥 딜런에게 영감을 준 다양한 인물도 그려진다. 배우 로비(히스 레저), 은퇴한 총잡이 '빌리'(리처드 기어)와 시인 '아서'(벤 위쇼). 그리고 음악적 스승 '우디'는 밥 딜런이 성장하면서 영양분을 받은 문화적 토양이다.

한때 가스펠에 심취했고, 총잡이에 매료됐으며, 시인 랭보를 좋아했던 그의 파편적인 자아들이 모두 모여 거대한 밥 딜런의 이미지를 담아낸다. 케이트 블란챗은 이 영화에서 밥 딜런과 흡사한 외모로 나오는 여자 배우다. 흑인에 여성까지 밥 딜런이 추구했던 모든 것들을 7개의 자아로 생동감 넘치게 그리고 있다. '원 모어 컵 오브 커피(One more cup of coffee)' 등 밥 딜런의 명곡들이 전편에 걸쳐 흐른다.

'아임 낫 데어' 이전에는 밥 딜런의 전기 영화가 단 한 편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아이콘으로서는 의아한 일이다. 수차례 제의를 했지만 밥 딜런이 모두 거부했기 때문이다.

토드 헤인즈가 밥 딜런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가장 조심한 것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기획안을 짜는 것이었다. '천재적인 가수' '시대의 목소리' 등 상투적인 표현으로 인물을 미화하는 식으로는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밥 딜런에게 보낸 최초의 기획안 제목은 '아임 낫 데어:딜런에 관한 영화에 있어서의 추정들'이었다고 한다. 딜런의 자아를 산산조각 내 또 하나의 인물로 추정해보는 것이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오해와 편견, 또 추앙을 교묘하게 빗겨가는 영악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시인, 선지자, 외부인, 가짜, 유명 스타, 록커, 회심한 기독인이라는 7개의 아이덴티티가 함께 모여 각각이 은유하고 있는 시대를 담고, 그들이 하나의 인물로 살아 숨쉬게 만들었다.

낯간지러운 숭배나 영웅 대접 없이 오롯이 그의 삶을 그리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프로젝트는 딜런의 마음을 움직였고, 드디어 밥 딜런의 첫 전기 영화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영화에는 36곡의 노래가 실려 있다. 60,70년대를 반추해 볼 수 있는 밥 딜런의 명곡들이다. 137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에 다큐멘터리적인 편집으로 인해 다소 생소한 느낌을 주지만 딜런의 음악을 듣는 것 만으로도 즐거운 영화다.

김중기 객원기자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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