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백불암 선생과 예(禮)

입력 2009-07-28 07:00:00

한국 성리학의 지형도로 볼 때 대구 지역은 퇴계학의 본거지 경북 북부지역의 남쪽에 위치하고, 또한 남명학의 본거지 경남 서부지역의 동북쪽에 위치하여 이른바 영남학파의 주변부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대구지역 출신 중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성리학자가 많지 않다. 그렇지만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1705~1786)선생은 주목할 만한 학자이다. 선생은 18세기 대구의 대표 학자이자, 또한 당시 영남 지역의 주요 학자이기도 하다.

백불암 선생이 남긴 서신을 보면 특히 예(禮)에 관한 언급이 가장 많다. 선생이 살던 시대 배경이 '예학적 성리학의 시대' 끝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천성적으로 논쟁을 싫어하였지만 유독 예에 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비교적 소상하게 밝히고 심지어 타인의 견해를 반박하기까지 하였다.

당시의 예론은 상당수가 실천적 지반을 상실하고 그야말로 '예'의 형식이 인간의 실질을 구속하는 본말 전도의 상황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백불암 선생의 경우는 달랐다. '예'의 본질을 실천성에서 찾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장지(葬地)를 정하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과 송사(訟事)가 일어나게 되자, 선생은 "사람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그 땅에 장례를 치르는 것은 돌아가신 분을 편하게 모시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처음 정한 장지를 버리고 다른 곳에 묘소를 정하였다.

이 예화는 백불암 선생이 무엇보다 인간을 소중히 여긴 인도주의적 사상가였음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또한 그의 예론이 이론만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진정 남을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에 바탕한 실천적 예론이었음을 알려준다.

요즘 전문적으로 예절을 교육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예절 교육이 지나친 형식주의와 전통에만 함몰되어 오히려 '예'의 참 뜻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예기' 첫 머리에서 '예'의 본질을 요약하여 '공경 아니하지 말지어다(毋不敬)'라고 설파하였다. 즉, 예의 근본 정신은 타인을 배려하고 공경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예절의 방식이 다르다 하여 상대를 면박하고, '정통'이라는 명분하에 함께 논의할 여지마저 앗아버리는 행위는 그 자체로 '예'의 정신에 반하는 행위이다. 오늘날 예절 교육을 담당하는 이들은 '예'의 형식성보다는 '예'의 본질에 충실하였던 백불암 선생의 예론(禮論)을 깊이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삶의 방식이 존중받고 싶을수록 타인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함은 '예' 이전에 모든 윤리와 도덕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장윤수 대구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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