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백두를 가다] (30) 사람이 모이는 땅, 의성

입력 2009-07-24 07:00:00

'三山'의 정기·'二水'의 젖줄…경북 3대 곡창지대 축복

의성은 삼산이수의 고장이다. 낙동강과 의성의 젖줄인 위천이 만나 이수(二水·사진)를 이루고, 보현지맥과 팔공지맥, 문수지맥의 삼산(三山)도 만나고 있다. 그래서 의성은 사람이 모이고, 경북의 3대 곡창지대라는 축복받은 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성은 삼산이수의 고장이다. 낙동강과 의성의 젖줄인 위천이 만나 이수(二水·사진)를 이루고, 보현지맥과 팔공지맥, 문수지맥의 삼산(三山)도 만나고 있다. 그래서 의성은 사람이 모이고, 경북의 3대 곡창지대라는 축복받은 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낙정나루(상주에선 낙동나루)는 옛 낙동강 물류의 종착지이자 집산지였다. 하지만 크고 작은 나룻배와 거룻배, 주막 등 옛 나루의 정취는 사라졌다. 지금은 조그마한 보트가 나루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낙정나루(상주에선 낙동나루)는 옛 낙동강 물류의 종착지이자 집산지였다. 하지만 크고 작은 나룻배와 거룻배, 주막 등 옛 나루의 정취는 사라졌다. 지금은 조그마한 보트가 나루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상주 취재를 마치고 일행은 상주 낙동의 낙단교(낙동과 의성 단밀을 잇는 다리)를 건넜다. 다음 행선지인 의성을 가기 위해서다. 금방이다. 500m가량의 낙단교를 건너자 바로 의성 단밀면 낙정리였다. 낙정나루(상주에선 낙동나루)가 있던 곳이다. 이 나루는 낙동강 물류의 종착지다. 옛날 나루의 주막과 숙소는 지금의 단밀 땅에 즐비했다. 지금은 주막 등이 들어섰던 터만 남아 있고, 고기잡이용 꼬마 보트 2대가 옛날 나룻배와 거룻배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하지만 불과 30여년 전만해도 나루는 제법 나루다웠다고 한다.

마을의 김종수(58)씨는 "1980년대 초 낙단교가 완공되기 전에는 주막과 밥집이 꽤나 있었고, 큰 거룻배가 버스와 경운기, 자전거, 봇짐장수를 실어 날랐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생기면서 옛날 나루 풍경이 기억 속으로 사라진 겁니다"고 했다. 지금 나루가 있었으면 제법 사람 냄새가 풍기고, 낭만에 젖을 만도 한데 말이다.

낙단교 바로 옆 언덕 위에는 잘생긴 누각이 있다. 바로 낙동강변 3대 누각인 관수루다. 이황, 주세붕 등 조선의 시인묵객들이 찾아 시를 짓고, 낙동강 정취에 젖어 노래를 부른 곳이다. 또한 나루를 찾는 손님들에겐 먼 한양 땅으로 가기 위한 임시 쉼터요, 숙소였다. 관수루는 나루가 남긴 유일한 유산인 셈이다.

낙정리 일대는 낙동강 경제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저 멀리 남해 바다에서 올라온 소금, 수산물 등이 '총집결한'곳이다. 이를 말하듯 낙정리에 위치했던 낙동역은 역에선 보기 드물게 참(站·조선시대 대형 숙박시설)이 설치됐고, 490명이나 되는 역리(역 종사원)가 근무했다. 낙정리 인근에는 소금을 저장·관리하는 염창도 있었다.

실제 일행이 본 낙정리 앞 낙동강은 강 폭이 넓은 곳은 어림잡아 700m를 넘었고, 축구장 크기 2, 3배나 됨직한 더 넓은 백사장이 강따라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었으니 옛 낙동강 물류의 종착지이자 집산지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낙정리는 옛날 상주 땅이었지만 지금은 의성 땅이다. 의성이 상주와 함께 낙동강을 품은 것이다. 이제 의성이 낙동강 중심 도시로 발돋움하는 상주와 머리를 맞대 이곳 낙정리의 낙동강 문화를 복원하고, 알리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일행은 다시 낙단교 위쪽 강변을 따라 길을 나서 상주 중동면 우물리 낙동강변에 다다랐다. 이곳에선 낙동강의 한 지류인 위천과 낙동강이 만나고 있었다. 위천은 의성의 젖줄이다. 군위 고로의 수기령에서 발원한 위천은 군위를 거쳐 의성을 가로지른 뒤 낙동강에 수천, 수만년 물을 내주고 있다. 또한 위천은 의성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담아 낙동강에 전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위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은 상주다. 위천을 양 고을의 경계로 삼았으면 위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은 의성 땅이 됐을텐테 아쉬움이 쉬 가시지 않았다.

우물리 위쪽 강변을 따라 발걸음을 다시 뗐다. 목적지는 다인면의 양서양수장이다. 양수장 일대는 바로 낙동강을 경계로 의성과 예천이 마주하는 곳이다. 양서양수장은 낙동강의 물을 담아 의성 땅에 내주고 있다. 안계 들(평야)을 중심으로 의성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쌀 주산지로 이름을 내는 것도 양수장 앞 낙동강 때문이다. 양수장의 낙동강은 의성 사람에겐 또 다른 젖줄이자 생명수가 아니겠는가.

의성의 서쪽 경계는 분명 낙동강이다. 의성은 낙동강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동시에 낙동강 경제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의성이 낙동강의 대표 고장이라고 힘주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게다.

의성은 낙동강과 위천이라는 이수(二水)를 가진 것도 모자라 삼산(三山)이라는 축복도 받고 있다.

일행은 차를 몰아 안계 들로 향했다. 지독하게 넓은 들이다. 들의 북쪽과 남쪽에는 두 줄기의 지맥이 얼굴을 마주하고 내달리고 있었다. 대개의 들을 낀 산들은 팔을 뻗으면 바로 잡힐 만큼 가까이 있지만 안계 들을 안은 두 지맥은 아무리 팔을 뻗어도 잡히지가 않았다. 그 만큼 광활한 안계 들을 안았다는 뜻이다. 이들 지맥은 바로 낙동정맥의 양대 지맥인 보현지맥(166.8㎞)과 팔공지맥(120.7㎞)이다. 포항 죽장의 가시봉에서 시작하는 보현지맥은 의성의 동남쪽과 청송 현서면의 경계인 구무산에서 의성 땅에 첫발을 디딘 뒤 천재봉→삼표당→문암산→골두봉→비봉산으로 거침없이 북진한다. 보현지맥은 비봉산을 기점으로 다시 의성의 서쪽 경계인 낙동강을 따라 남진, 위천에서 평온히 자리를 잡는다.

군위와 청송, 영천의 경계에 위치한 석심산에서 시작하는 팔공지맥은 군위를 거쳐 의성의 남쪽인 청화산으로 편안히 들어온다. 팔공지맥은 장자봉과 만경산 방향으로 서진, 보현지맥처럼 위천이 종착지다.

어찌보면 위천은 이수와 이산이 만나는, 의성 사람들이 풍수지리적으로 매우 신성시 여기는 지역인 것이다. 보현지맥은 의성의 지붕이고, 팔공지맥은 의성의 남쪽을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보현지맥과 팔공지맥은 산줄기의 키가 400~700m에 불과한 데다 산의 얼굴도 둥글둥글해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안온하다. 그래서 양 지맥 사이에는 다인, 안계, 단북, 단밀, 구천, 비안 등 의성의 서부 6개면이 자리하고 있고, 안계 들로 대표되는 광활한 평야가 의성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들 지맥은 의성의 아래 위를 감싸니, 분지가 돼 여름이 덥고, 쌀, 마늘 등 농작물이 잘 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성의 또 다른 지맥은 바로 문수지맥이다. 문수지맥은 백두대간의 줄기인 봉화의 문수산에서 시작해 영주와 안동, 예천 땅으로 힘차게 내달리고 있다. 문수지맥은 안동과 예천에 경북의 새 도청 소재지를 제공한 지맥이다. 문수지맥은 예천 풍양의 삼강 인근에서 힘찬 기세를 멈춘다. 바로 문수지맥이 끝나는 예천 삼강과 마주한 곳이 바로 의성 다인이다. 의성은 문수지맥이라는 고산준령의 힘찬 정기도 이어받고 있다.

의성은 어머니의 안온함과 아버지의 힘찬 정기, 즉 삼산을 모두 가졌다. 낙동강과 위천이라는 이수도 안았다. 삼산이수의 품에 안긴 명당 중의 명당이 바로 의성인 것이다. 이제 의성 바로 알기는 바로 삼산이수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이종규기자 의성·이희대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김종우 한국문화원연합회 경북지회장 안종화 의성군 재산경영담당 김문진 의성군 문화예술담당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