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충진의 여기는 독도] (72)-의용수비대② "日 군함이다" 1953년 7월 23일

입력 2009-07-14 09:53:01

독도평화호를 지켜보는 독도경비대원들은 우리 땅 독도를 지키기 위해 낮도

7월 첫 주말 울릉군 주민과 기관단체장 등 80여명을 태운 독도평화호가 독도에 첫 입항을 하고 있다.
7월 첫 주말 울릉군 주민과 기관단체장 등 80여명을 태운 독도평화호가 독도에 첫 입항을 하고 있다.

일본의 억지가 없는 독도는 평온하다. 괭이갈매기들은 스스로 새끼를 치고, 바위 틈 땅채송화는 홀로 꽃을 피운다. 멀리 수평선 너머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도 한가롭다.

독도의용수비대는 서도에 초사(哨舍)를 마련한 지 두어 달이 지나자 나름대로 생활의 틀이 잡혔다. 평온한 날들, 바다에서 나고 자란 대원들은 옥색 바다에 뛰어들어 전복과 소라를 잡고 미역을 뜯는 것으로 소일했다.

나른한 일상 가운데 대원들은 '깔따구'(바다 모기) 공격을 막기 위해, 살갗을 물개가죽처럼 검고 질기게 태우는 것을 일거리로 삼았다. 10명 남짓 사내들만 있는 외딴 섬, 밝은 대낮일지라도 그들에게는 가리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인간 물개'들이 독도를 완전 점령한 것.

의용대원들은 밤이면 소금기에 절고 습기에 눅은 몸을 추스르기 위해 술을 찾았다. 특히 찬거리 대부분이 바다의 비린 것들이다 보니 술은 더욱 간절했다. 그해 여름 동안 대원들은 1.5되들이 소주병 100통을 비워냈다. 보급선이 올 때마다 양조장 외상술값 독촉이 날아들었다. 나중에는 술값 감당이 되지 않자 누룩을 사다가 막걸리를 빚어서 들이켰다.

술타령과 자맥질로 하루하루를 뭉개는 가운데도 동쪽 바다를 향한 경계의 눈초리는 늦추지 않았다.

1953년 6월 어느 날. 정상에서 보초를 서던 대원이 수상한 배가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흰 페인트를 깨끗하게 칠하고 일장기를 달았지만 '지토마루호'에는 기관포나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홍순칠과 대원들은 배가 섬에 정박하자, 기관총을 거치한 전마선으로 퇴로를 차단하고, 배를 나포했다. 배는 시마네현 수산고등학교 교사 7명과 학생들이 탄 실습선이었다. 의용수비대원들은 일본인 교사와 학생들에게 배에서 내리게 한 다음 독도가 한국 땅임을 주지시키고 의약품과 식량 따위를 압수한 후 돌려보냈다.

"일본 군함이다!" 7월 23일 새벽 5시. 두 시간마다 교대하며 보초를 서던 김은호 대원으로부터 또 다시 긴급 보고가 들어왔다.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PS9함이 독도의용수비대 막사 전방 200m까지 접근해 온 것.

대원들은 즉각 전투위치로 산개, 서기종 대원의 지휘 아래 엄호사격 태세에 들어갔다. 홍순칠 대장은 조상달 이상국 황문영 대원과 함께 전마선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일본 함정에 20m까지 돌진, 순식간에 200여발의 총탄을 함정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두터운 함정 철판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섬 바위틈에서의 엄호사격과 전마선의 갑작스런 연발사격에 놀란 일본함정은 서도 가제바위를 돌아 멀리 동쪽으로 도망쳤다.(홍순칠 저 '이 땅이 뉘 땅인데')

첫 전투에서 기관총 사격만으로 요행히 일본 함정을 퇴각시켰지만 앞으로도 소총만으로 중무장한 함정을 물리칠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홍순칠 대장은 포(砲)나 중화기 무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느꼈다.

다음날 홍 대장은 말린 '해구신'(海狗腎-바다사자 수컷의 생식기) 몇 개를 챙겨, 독도 근해로 고기잡이 나온 묵호 배를 얻어 타고, 육지로 나갔다. 그는 곧바로 대구로 달려가 경북병사구 사령부의 간부를 만나 해구신 하나와 소총 2정을 맞바꿨다.

홍 대장은 다시 당시 '백두산 호랑이'로 이름을 날린 김종원 경찰국장을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경찰국으로부터 전쟁 중에 노획한 소련제 직사포 1문과 조준대가 없는 박격포 1문을 지원받았다. 그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소총과 탄환 등을 추가로 입수해 보급선 '삼사호'에 그득 싣고 독도로 돌아왔다.

애초 식수문제 때문에 서도 물골 앞에 막사를 세운 의용수비대는, 중화기가 보완되자 경비상 동도로 옮기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다. 홍 대장은 무기를 실은 삼사호 뱃머리를 돌려 동도에 정박시키고 본부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대원들은 곧바로 동도에 임시 천막을 치는 한편 중화기를 거치할 진지 구축에 들어갔다.

이로써 대한민국 독도경비대 역사에 있어 '동도 시대' 그 첫 장을 열게 되었다. 56년 전 '알몸'의 의용수비대 선배들이 해머를 내리치며 처음 천막 말뚝을 박았던 곳에서 오늘날 독도경비대 대원들 역시 우리땅을 지키기 위한 날카로운 경계의 눈초리를 세우고 있다.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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