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학 장학생 합격, 2人의 성공담

입력 2009-07-07 06:00:00

김정경(사진 왼쪽)양과 이동건군은 미국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이들은 9월이면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유학간다. 성일권기자 sunging@msnet.co.kr
김정경(사진 왼쪽)양과 이동건군은 미국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했다. 이들은 9월이면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유학간다. 성일권기자 sunging@msnet.co.kr

해외 유학생 20여만명 시대. 지난해 미국에 있는 한국 유학생만 12만여명(미 국토안보부 발표)에 이른다. 큰 꿈을 가진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볼 만한 해외 유학이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1년에 수천만원 하는 등록금에 생활비까지 더하면 억대를 훌쩍 넘어버린다. 환율도 높고 경제사정도 어려워진 요즘이라면 사정은 불 보듯 뻔한 셈. 실제로 지난 1~5월 유학·연수 대외지급액은 13억5천2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18억8천500만달러보다 28.4%가 줄었다. 1∼5월 기준으로는 IMF 직후인 1998년(-35.2%) 이후 가장 큰 감소율이다.

9월에 미국의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김정경(19)양과 이동건(19)군은 이런 고민을 덜었다. 당당히 장학금을 받고 합격했기 때문이다. 지난 2일 오후 대구 삼덕동 한 외국어학원에서 두 사람을 만나, 장학금 받고 미국 대학에 합격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조기유학 어려움 극복하고 약대 진학

김정경양은 필라델피아과학대의 약학대학(Philadelphia College of Pharmacy) 과정에 전액 장학생(6만달러)으로 합격했다. 이곳은 현재 필라델피아과학대를 있게 한 미국의 첫번째 약대라는 전통을 갖고 있다. 김양은 "합격증을 받았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아 뛰어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이내 허무한 느낌이 밀려 오더라"고 덧붙였다. 김양은 "남을 돕는 일에 관심이 많다"며 "가난으로 약 한 번 제대로 못 써보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고등학교 3년간 양로원 겸 병원시설에서 봉사활동으로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이다.

김양은 조기유학 출신이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05년 여름 유학길에 올라 줄곧 미국에서 생활해 왔다. 어릴 적부터 영어를 좋아했다는 김양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유학의 꿈을 꿨다. 당시 미국에서 1개월간 영어캠프에 참가했다가 너무나 강력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 김양은 "처음에는 외국어고 진학을 희망했다가 교환학생 쪽도 알아본 뒤에 결국 유학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항상 딸의 뜻을 존중했던 부모님 덕에 유학길에 오르기까지 김양은 고민을 많이 안 했다고 했다. 자기가 원했던데다 잘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시작한 유학생활은 쉽지 않았다. 영어로 말하기는 자신 있었지만 원어민과 함께 영어로 수업하는 것은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글 꽤 쓴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외국어인 영어로 글쓰기를 하면서 왠지 주눅이 들었다. "발표할 때도 거침없었는데 미국에서는 단답형 대답밖에 안 나와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라요."

김양은 외국인 유학생으로서의 애로사항을 질문으로 해결했다. 미국 친구들에게도, 교사에게도 자신의 글이 제대로 된 것인지 끊임없이 확인했다. 과외 활동으로 하는 운동이나 동호회 활동을 통해 친구들과 어울리며 친분도 쌓았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홀로살이였지만 이런 식으로 이겨 나갔다.

◆떠돌이 생활 속에 키운 의사의 꿈

이동건군은 UC데이비스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at Davis)에서 생물학을 전공할 예정이다. 전체 5만달러 학비 가운데 절반을 지원받는다. 1년만 지나면 캘리포니아 주민 자격을 얻어 등록금 자체가 7천달러로 줄어드니 더욱 안심이다. 이군은 합격 소식을 먼저 e-메일을 통해 알게 됐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어요. 당시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 알리니 울면서 포옹하시더군요."

이군은 큰 병원을 여러 개 지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은 것이 소원이다. 아프리카에 가서 의료봉사도 하고 싶다. 이군은 "적십자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인생의 끝인 죽음을 많이 목격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군도 조기유학생에 속한다. 5세 때 미국 알래스카 주에 있는 이모댁에 간 뒤 미국에서 줄곧 생활했다. 사업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아들의 성공을 위해 부모가 내린 결단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만리타향 생활에 밤마다 혼자 울먹이는 시간도 많았다. 4년간 겪은 한국의 문화와 미국의 문화도 너무 달랐다. 말까지 통하지 않으니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런 애처로운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군은 "'울어선 안 된다'는 이모의 말에 어느 날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굳은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일종의 떠돌이 생활이었다. 알래스카에서 위스콘신주로, 다시 워싱턴주를 거쳐 뉴저지, 유타주까지 미국 대륙 동서를 횡단했다. 세탁소 일을 하며 용돈을 버는 가운데 학교 생활이 힘들었을 것도 같지만 이군은 "어딜 가나 적응을 빨리 하게 됐다"며 웃었다. 그래서 집안 사정이 더 어려워져 10여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고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서울의 친척집에서 평택의 한 국제학교로 통학하면서 몸이 망가졌던 것. 이때부터 10㎡(약 3평)도 안 되는 조그만 '고시텔'에서의 자취생활이 시작됐다.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인내할 정도로 부쩍 자라 있었던 것. 이군은 "유년 시절의 어려움을 주제로 쓴 입학에세이가 호소력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오늘의 나는 모두 부모님 덕

김양과 이군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결국 숨은 주역은 부모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이에 '당연하다'고 대답했다. 이국땅에 홀로 내놓은 아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고 큰 꿈을 갖게 한 것도, 험난한 유학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딸을 물심 양면 지원해 준 것도 부모였다.

"멀리 있어도 사랑과 열정으로 보살펴 준 부모님은 제 인생에 큰 '충격'(강한 영향력)을 주셨습니다."(이군)

"부모님의 기도와 응원이 없었다면 못해 냈을 거예요."(김양)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해외 유학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

김정경양과 이동건군은 공통으로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을 권유했다. 김양은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라"며 "힘들어도 좌절하지 말고, 언제나 '나는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기애를 가져라"고 말했다. 성적 관리는 물론 봉사활동에도 힘써야 한다는 것이 김양의 조언이다. 이군도 같은 생각이었다. 김양은 요양시설에서, 이군은 적십자병원에서 나이 많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깨달았다.

이군은 "무엇보다 자기가 누군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록 이국땅에서 질시를 받더라도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군은 더불어 생활이 어렵더라도 인내하고, 이해심을 가지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 공부해야 할 점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에 지원할 때에도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김양은 "대학을 지원할 때는 정보수집이 중요하다"고 했다. 본인도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막연한 꿈을 구체화하고, 자신에게 적합한 교육과정이 있는 대학을 찾을 수 있었다. 에세이를 쓸 때에는 "자기의 관심사항이나 잘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은 이군 역시 강조하는 사항이다.

다양한 과외활동도 필수인데, 이는 학교생활을 하며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김양은 플루트로 음악활동을 했는데, 테니스와 축구도 즐겼다고 한다.

조문호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