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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독자인 아버지 밑에 2살 터울로 총총 4남 2녀. 내가 어릴 적에는 6남매가 그리 다자녀 가정도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 기억엔 정말로 지지리도 가난했었다는 것과 올망졸망 6남매들이 좁은 방 한 칸에 득시글득시글했던 기억입니다.
8평짜리 집에 작은 방 하나는 남에게 세를 주고, 2개의 방에 부모님까지 8식구가 살았습니다. 큰방에서 골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고, 부엌에서 큰방으로 바로 밥그릇이나 국그릇이 드나드는 봉창도 있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큰방에 두리상이라고 불리는 둥글고 큰상을 펴 놓고 부엌에서 어머니가 밥을 퍼서 봉창으로 건네주면 우리들은 방안에서 그 밥을 받아서 상을 차렸습니다. 상 위로 음식들이 옮겨지고 아버지가 먼저 수저를 드시면 우리들의 식사는 시작됩니다.
가끔 가다 꽁치가 반찬으로 나올 때면 어머니는 한 마리를 3등분하여 각자 한 동가리씩 아주 조그마한 접시에 담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같은 형제간에도 6남매들이 전부 다 달랐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꽁치를 팍팍 먹었고, 바로 밑에 동생은 마지막 밥숟가락을 입에 넣을 때까지 꽁치토막을 애지중지 아껴두었다가 마지막에 맛을 음미하면서 먹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생은 늘 내 표적이 되었고 동생 것을 뺏어 먹다가 늘 아버지께 혼이 나곤 했습니다.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을 한 장씩 주면 나는 틀림없이 8등분을 해서 빨리 밥을 싸서 먹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16등분을 내어서 아껴 먹다 몇 개는 나에게 뺏기고 맙니다.
그 당시의 역경들을 이겨내고 6남매가 다 그런 대로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계성고등학교에서 35년째 영어교사로 근무 중인 형님, 포항 현대제철 부장으로 근무 중인 나에게 제일 피해를 많이 본 동생, 포항한동대 교수로 근무 중인 여동생, 미국에서 신문사를 운영하다가 지금은 작가로 활동 중인 동생, 동사무소에서 근무 중인 막내 여동생 등.
자녀가 많은 것이 키울 때는 힘이 들었지만 세상에서 제일 큰 축복이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노년을 다복하게 보내고 계시는 부모님.
6남매가 뽁짝뽁짝거리면서 커왔었지만 그래도 우애 있고, 효심 깊고 한 우리 형제들을 볼 때마다 '자녀는 많을수록 좋구나'라고 느낍니다.
박병규(대구 중구 동성로2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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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전, 나는 6남 1녀의 넷째 아들과 결혼을 했다. 결혼 당시 세 형님에게 6명의 조카가 있었다. 얼마 전 6남인 막내 도련님이 결혼을 했다. 그래서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다 모이면 아버지 어머니를 포함한 어른과 조카들이 모두 26명이다. 가을이면 태어날 막내 조카까지 합한다면 내년 설이면 27명이다. 말이 27명이지, 이제 조카들도 자라서 어른 수준이 되었고 아침부터 하루 종일 준비했는데도 한 끼 식사를 하고 나면 먹을 것이 없다. 상은 최소 3개 이상은 차려야 하고 식은 밥이 남는 것이 싫다고 딱 맞게 하다 보면 며느리들인 우리는 먹을 밥이 없어 배고픔을 다른 반찬으로 달래며 밥을 새로 짓기까지 기다려야 할 때도 많다. 식구가 많다 보니 식사 후 설거지도 만만찮아 설거지를 마칠 때쯤이면 점심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된다.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지만 그래도 힘들지만은 않다. 큰 형님의 지시에 따라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을 때의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면 부엌에서는 웃음꽃이 핀다. 시어머니는 아들들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며느리들 뭐라 하는지도 들어야 하고 손주들 노는 모습도 보아야 하고 이 방 저 방 다니시기 바쁘시다.
형님의 지시에 따라 각자 자기 집에서 조금씩 음식을 해오다 보니 시골집에서 하는 것보다 빨리 끝이 나고 여유가 생겨 지난 명절에는 가까운 대학 운동장에 가서 운동도 하고 바람도 쐬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올해 명절은 막내 동서가 더 들어왔으니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더 필 것 같다. 늘 막내이던 우리 집 둘째도 이젠 어린 동생이 생기면 좀 더 의젓해질 것을 기대해본다.
김영은(대구 수성구 상동)
♥(사진)
어릴 땐 언니들이 많은 게 너무 싫었다.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어도 새 옷 한번 입어보지 못했다. 내 방 한번 제대로 가져 보지 못한 설움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식사 때는 빨리 먹지 않으면 맛있는 반찬이 동나고, 빛바랜 체육복을 물려 입어 체육 시간이면 혼자 튀곤 했다.
난 1980년생 치고는 참 보기 드물게 6남매의 넷째다. 왜 이렇게 많은지는 묻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바로 아들을 얻기 위한 것. 많은 식구만큼 항상 아껴 쓰고 나눠 써야 했다. 용돈은 항상 부족했고, 갖고 싶은 것 하나 제대로 갖기 힘들었다. 빨리 벗어나고픈 시절이었다.
하지만 남동생을 제외한 모두가 인생의 반려자를 만난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웃음뿐이다. 어릴 땐 대가족인 것이 그렇게 싫더니 이제는 이렇게 좋을 수 없다. 주말에 한번 다 같이 모이기라도 하면 잔칫집이나 다름없다. 국수를 삶기라도 하면 큰 솥이 있는 장작불에 삶아야 하고, 밥은 10인용 밥솥에 두 번을 해야 한다. 후식으로는 수박 한통이다.
6남매를 키우신 부모님은 매년 외손주를 한명씩 얻는다. 자매끼리 이웃에 살며 재미있게 지내다 보니 다들 자식 욕심이 많다. 부모님은 내년이면 아홉 번째 외손주를 보신다. 지금도 가끔 이름을 바꿔 부르시는데 이러다가는 외손주 이름도 다 외우지 못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매년 여름 휴가 때면 친정집에 모여 다 함께 여름을 보낸다. 계곡으로 물놀이도 가고 편을 나눠 제기차기도 한다. 아버지께서는 외손주를 위해 고구마나 옥수수 등을 직접 삶아주시기도 한다. 휴가 때 그럴싸한 해외 여행 한 번 가지 않아도 가족이 같이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다.
몇 년 후에는 가족 운동회를 열어 볼 생각이다. 그때는 또 어떤 에피소드로 우리 가족을 즐겁게 해 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박해옥(대구 달서구 송현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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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아이 일곱을 두었다.
첫째를 낳던 날 밤에 나는 출산의 고통과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잠든 사이에 빨아 넌 기저귀는 바람에 뽀송뽀송 말라갔다. 아이가 자면서 살포시 웃는 모습을 보며 나는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보았다.
둘째 딸이 태어났을 때에는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이름을 진주라고 지었고, 셋째 딸이 태어났을 때에는 보배라 지었다. 그리고 넷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의 얼굴이 너무 총명하게 생겨서 일기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아이들이 어떻게 커 갈 것인지를 보려고.
다섯째 딸이 태어났을 때에는 나는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잠을 자지 못하고 잠든 아이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여섯째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위의 아이들이 갓난아이를 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 애들도 새 생명에 신기해 했다. 그리고 또 일곱째 딸이 태어났다.
어딘가 남편과 나를 닮은 아이들 일곱.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나를 늘 감격하게 했다. 첫째와 둘째는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여 대학에 다니고 있다. 감사하게도 동생들도 학원을 가지 않아도 밤늦은 시간까지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한다. 공부하는 아이들 옆에서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기를 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이 아이들이 내 곁에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김순호(김천시 성내동)
※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패션 아울렛 올브랜 10만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원고 분량은 제한 없습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체육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영신(대구시 수성구 지산동)
다음 주 글감은 '불량식품'입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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