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제(養齊) 이갑규(53·대구시 수성구 범어4동)씨는 '삶의 깊이와 도리'를 말했다. 경박(輕薄)한 삶을 경계했다. 삶의 형식보다 내용에 무게를 실었다. 가치관이 뚜렷한 삶을 위해 우선 '나'의 정진과 수양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나아가, 서양의 역사 이전에 한국의, 동양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우선돼야 한다고 했다. 동양학, 주자학의 근본사상을 이해하고, 뿌리를 알기 위해 기초가 되는 한문교육의 필요성을 여러 번 강조했다. '뿌리'를 모르고, 가지와 열매를 얘기할 수는 없다는 것.
모습은 단아했고, 말투는 분명했다. 말은 무거웠고, 힘이 있었다. 대구에서 20여년 강학한 탓에 따르는 제자들도 많았다. 진중한 유학자(儒學者)였다.
"농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볍씨를 먹지는 않습니다. 굶을지언정 내일을 위해, 미래를 위해 종자는 보존하는 것이지요. 씨앗이나 뿌리가 있어야 줄기와 가지가 뻗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씨는 학문을 그 볍씨에 빗댔다. 돈이, 물질이 우선시 되는 세태에도 인간의 근본인 정신은 결코 도외시해서 안 되는 가치라는 것.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 풍조를 개탄했다. 입시위주, 성적위주의 교육을 안타까워했다. 정신과 사상이 바로 선 사회를 얘기했다. '돈'이나 권력으로 움직이는 지도자가 아니라, 정신적 지도자가 절실하다고 했다.
이씨는 "지도자는 존이감당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천자문의 하나를 소개했다. '존이감당(存以甘棠)'은 선정을 베푼 중국 관리의 예를 든 내용의 한 글귀를 천자문에 옮겨놓은 것. 그 관리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리지 않고 항상 문턱이 높은 관청 안에 머물지 않은 채 감당나무 아래에서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며 선정을 베풀었던 것. 그 관리가 떠난 뒤 다음 관리가 궁궐 같은 관청을 짓고 무거운 세금을 물리며 감당나무까지 베려고 하자 백성들이 옛 지도자를 그리워하며 그 감당나무를 지켰다는 고사에서 나온 내용이다.
그는 소학(小學; 1187년 중국 유자징이 주희의 가르침으로 지은 수양 입문서) '선행편' 끝문장을 종종 인용한다.
'사마온공이 말하길, 선공(아버지)이 군목판관으로 계실 적에 손님이 오면 항상 술을 대접했다. 술은 저자에서 사오고, 안주는 평소 집에 있는 나물 등이었고, 그릇도 나무그릇을 사용할 만큼 호화롭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대접을 나쁘게 여기지 않았고, 자주 모이면서도 항상 예를 지켰고, 상차림은 검소했지만 정은 서로 두터웠다'
비싼 술과 고급 그릇, 진기한 음식을 대접해야 '뒷말' 없이 대접받았다고 여기는 세태, 형식에 치우친 요즘 세태와 대비되는 글이다. 사람간의 소통과 정, 형식보다 내용이 더 소중한 가치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이씨는 어릴 적 조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글 읽기를 게을리할 때 회초리로 많이 맞기도 했다. 10대 때 조부가 돌아가신 뒤 경남 산청, 합천 등지에서 유학 스승을 찾았다.
산청의 산석(山石) 민영복 선생, 합천의 추연(秋淵) 권용현 선생은 한문과 주자학을 가르쳐 준 이씨의 큰 스승이다. 스승의 가르침 이후 22년 전인 1987년 대구에 뿌리를 두고, 소학 등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가르치면서 배우고 또 배웠지만, 유학의 길은 멀고도 끝이 없는 것 같다. 이씨는 손에서 좀처럼 책을 놓지 않는다. 대구 향교에서, 거처인 양정서당(養正書堂)에서, 대학에서 학생과 일반인들에게 한문과 고전을 강학하지만, 늘 가르치면서도 또 공부한다.
'소학'을 비롯해 '고문진보'(송나라 황견 지음, 주나라부터 송나라까지 시문을 엮은 책) '서전'(송나라 주희의 제자 채침 지음, '서경'에 주해를 달아 편찬한 책) '시경'(편찬자 미상, 주나라부터 춘추시대까지의 시를 모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 등이다. 양정서당에서 이씨를 만났다.
-왜 유학입니까.
"3천년 전의 한자가 여전히 동양학문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 글을 기초로 한 유학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유효합니다. 유학의 깊이와 넓이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겠지요. 서양학문에 능통한 사람일지라도 동양학의 뿌리가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유학은 우리 삶의 뿌리이면서 바른 삶의 지표이기도 합니다."
-시대의 코드에 맞지 않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돈이 중심이 된 사회, 권력과 명예가 돋보이는 사회라고 해도 인간의 근본 가치와 삶의 바른 길을 잊어서는 곤란합니다. 자본주의사회이지만 그 사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고, 인간은 바른 정신과 가치를 가질 때 비로소 제구실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대 우리 사회의 교육을 어떻게 보십니까.
"입시위주의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숫자나 책 제목에 대해서는 많이 알면서도 그 속에 담긴 내용이나 뜻에는 무관심한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지시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로봇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삶이 인간의 바른 길이겠지요."
-한자교육이 지금도 중요합니까.
"영어를 배우고, 피아노를 배우면서도, 한자는 외면하고 있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한자교육은 선조들의 삶을 제대로 알고, 이를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기초입니다. 철학이나 역사, 문화예술의 근본바탕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유학의 뿌리와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한문교육이 기초가 돼야 합니다."
"서양 철학이나 문학, 예술을 알기 위해 기독교 정신을 알아야 하듯, 동양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한문을 우선 알고 난 뒤 고전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파악해야 하겠지요. 현재의 암기식 교육은 문제가 있습니다. 한문을 해야 그 글에 담긴 내용과 사상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젊은이가 가져야 할 태도는.
"고전을 공부하려는 젊은이 수도, 인식도 점차 엷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선인들의 말과 글 속에 진리가 있다고 봅니다. 책 속에 길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스스로 바른 길을 찾아야 겠지요. 항상 공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고 있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중요하지만, 돈이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인간의 도리에 대해 먼저 배워야만 바람직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않겠습니까."
"한국사회를 이끄는 유학파 중에는 서양의 역사나 철학에 대해서는 해박하면서도 정작 우리 문화나 역사의 뿌리인 동양의 학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소홀한 측면이 있습니다. 돈과 물질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는 수단은 될 수 있겠지만, 삶 자체를 풍요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은 학문이자, 사상입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사진 이채근기자 min@msnet.co.kr
양제(養齊) 이갑규는?
1957년 경남 사천 출생. 어릴 때 조부(有菴 이후림)로부터 한문 수학. 중어중문학 전공. 산석(山石) 민영복 선생, 추연(秋淵) 권용현 선생 문하에서 한문 수학. 대구대 동양어문학부 겸임교수.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 대구향교에서 고전강좌 및 대학생 한문연수지도. 양정서당(養正書堂)에서 경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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