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월 28일 일본 내각회의.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은기도(隱岐島)로부터 85해리에 있는 무인도는 타국이 이를 점령하고 있다고 인정되는 자취가 없기 때문에 일본 영토에 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라고 명명하고 시마네현(島根縣) 소속 은기도사의 소관으로 한다."
1904년 2월. 아시아의 맹주를 꿈꾸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뤼순(旅順)항에 정박해 있는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해 격침시키면서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6월, 반격에 나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는 쓰시마(對馬)해협에서 일본 육군 수송선 2척을 수장시킨다.
일본과 러시아는 동해에서 제해권(制海權) 확보를 놓고 국운을 건 공방전을 펼친다. 기선 제압에 나선 일본은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감시하기 위해 죽변과 울릉도 등 한반도 해안 20여 개소에 망루 설치작업을 개시한다.
특히 일본 해군은 러시아 군함 3척이 독도 부근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리앙쿠르도(島)에 전신소 설치가 적합한가 아닌가를 시찰하도록' 군함 쓰시마호에 지령한다. 쓰시마호는 독도를 둘러보고 서도 동쪽 아래와 동도 남단 평탄지가 후보지이며 식수는 공급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답사를 토대로 일본은 죽변-울릉도-독도-출운국(出雲國) 송강(松江)을 잇는 망루를 설치해 해저통신선을 가설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망루 설치와 해저전선 부설은 1905년 10월 완료해 가동된다.(신용하 저 '독도 보배로운 한국 영토')
일본과 러시아가 동해상에서 각축을 벌일 즈음,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나카이(中井養三郞)라는 강치잡이업자가 독도에 대해 어업독점권을 출원하러 나선다. 그는 잠수기(潛水器)를 구입해 한반도 연안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해표(海豹) 따위를 잡는 어업자. 독도에서 강치잡이로 재미를 보자 다른 업자들이 달려들지 못하도록 대한제국 정부에 '독도 어업독점권'을 대부(貸付)하려고 일본 정부 고관들과 접촉했다.
"…본도(竹島·독도)가 울릉도에 부속하여 한국의 소령(所領)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고, 장차 통감부에 가서 할 바가 있지 않을까 하여 상경하여 여러 가지 획책 가운데, 당시의 수상국장 목박진(牧朴眞)씨의 주의로 말미암아 반드시 한국령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겨서…."
강치잡이 업자 나카이가 시마네현에 이력서와 함께 제출한 '사업경영개요'의 서두 부분이다. 이 문서를 보면 일본이 어떻게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편입하고자 획책했는지 소상히 드러난다.
나카이는 스스로 적시하다시피 독도가 대한제국령임을 잘 알고 독도에 대한 '강치잡이 독점권 대부 문서'를 일본 정부를 통해 대한제국에 제출하고자 한다. 통감부에서 대부업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산국장의 말로, 나카이는 독도가 대한제국령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수로국장한테 단정(斷定)해 줄 것을 의뢰한 결과, '본도가 전적으로 무소속임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나카이는 '경영상 필요한 이유를 모두 진술해서 내무·외무·농상부에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하고 대하(貸下)해 줄 것을 바라는 원서를 출원한다.
원서를 접한 내무성 관리는 '(러일전쟁 시기에) 대한제국 영지의 의문이 있는 불모의 암초를 거두어 외국으로부터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을 우려가 있다'면서 원서를 각하(却下)시키려고 했다.
이에 나카이가 다시 외무성에 가서 따지자 "이 시국이야말로 그 영토 편입을 급히 필요로 하고 있다. 망루를 건축해서 무선 또는 해저전선을 설치하면 적함(敵艦) 감시상 지극히 좋지 않겠는가"면서 "내무성과 같은 고려는 필요 없다"고 말해 "드디어 본도(독도)는 본방(일본) 영토에 편입하게 된 것이다"며 진술하고 있다.
오직 무력으로 주변국 점령에 나선 일본 제국주의자 앞에서 '동해의 작은 섬' 독도는 한낱 검불에 지나지 않았다. 몇몇의 정부관료 의견과 판단에 따라, 엄연한 외국의 영토가 '무주지'로 탈바꿈해 버렸다. 또 그 엉터리 근거로 내각회의는 자기네들끼리 영토편입을 결정하고 지방관보에 게시한 것으로 그만이었다.
그 후 이듬해 3월 일본 시마네현 은기도사 사무관 신전유태랑(神田由太郞) 일행이 독도를 시찰한 다음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러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독도가 일본에 편입되었음'을 처음 말했다.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받은 대한제국의 내부대신은 "독도에 대하여 일본 속지(屬地)라고 말한 것은 전혀 이치에 없는 매우 아연실색할 일"이라고 개탄하며 하명했다.
"(일본인의) 독도 영지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니 해당 섬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변화된 사항을 조사, 보고하라." 1906년 4월 29일 대한제국 의정부 참정대신 지령문 3호의 내용이다. 전충진기자 cjje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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