肖像畵(초상화)에 대한 동양과 서양의 태도는 달랐다. 서양이 기법을 중시하면서 예술성 확장으로 나아갔다면, 동양은 정신까지 구현하는 것을 지향했다.
그래서 서양의 절대주의 시절 군주를 그린 초상화는 실제보다 과장됐다. 못난 것을 가리고 좋게, 부족한 것을 숨기고 훌륭하게, 최대한 예술성을 가미해서 표현했다. 동양에서는 초상화를 인물 그 자체로 생각하고 실제대로 묘사하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 '터럭 한 올까지도 같아야 한다'(一毫不似 便是他人)는 생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초상화가 본격 그려진 것은 조선 초기부터다. 조정에서 개국공신 수백 명의 화상을 그려 하사한 것이다. 지방에 있는 문인, 유학자의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는 17세기 이후로 본다. 성리학의 저변이 확대돼 崇祖(숭조)의식이 강화되고, 왕실과 일부 명문세가만 만들었던 족보가 확산되면서 훌륭했던 할아버지를 돌아가신 뒤에도 모시려는 욕구가 초상화 제작으로 이어졌다.
조선 이전에도 초상화는 있었다. 목은 이색, 익재 이제현 등 고려 말 문인 초상화가 전해져 온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부부 초상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이전으로는 현존하는 초상화 수가 너무 적어 학술적으로 어떤 연구 결과를 이끌어내기가 어렵다.
조선조에 꽃핀 우리 초상화의 특징은 사실성이다. 점, 흉터까지 숨김없이 재현했다. 심지어 마마 자국도 그대로 그렸다. 현대 연구자들이 초상화를 보며 당시 유행했던 피부병을 가늠해 볼 정도다.
사실적 묘사에만 그친 것은 아니다. 정신, 기백, 영혼을 담지 않으면 초상화로 남기지 않았다. 중국 회화 사상 인물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동진시대 顧愷之(고개지)가 "형상으로써 정신을 그려야 한다"며 펼친 傳神(전신)사조의 영향이다.
조상의 초상화는 그림이 아닌 곧 할아버지 당신이었다. 지금도 유수한 집안의 후손들이 할아버지 초상화를 '보지' 않고 '알현한다'고 말하며, 초상화를 접할 때마다 돗자리 깔고 신발 벗고 두 번 절하는 이유다.
22일부터 안동 한국유교문화박물관에서 열리는 '초상, 형상과 정신을 그리다' 전에는 이 같은 특징을 잘 보여주는 초상화 14종 18점이 전시된다. 그분들의 삶과 사상을 미리 알아보고 가 뵈면, 초상화 앞에서 몇백 년을 뛰어넘는 육성 대화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상훈 북부지역본부장 azzz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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