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육강식의 시대…처세書 범람시대

입력 2009-06-20 06:00:00

▲ 세상 살이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처세·자기계발 서적이 국내 베스트셀러의 한 축을 형성하며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 세상 살이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처세·자기계발 서적이 국내 베스트셀러의 한 축을 형성하며 꾸준히 팔리고 있다. 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IMF 외환 위기 이후 서점가에 '이인국'씨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2000년을 지나면서 도처에 이인국씨다.

학창시절 한번쯤 들어봤을 이름 이인국, 작가 전광용이 1962년 7월 사상계에 발표한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이다. 이인국은 실력 있는 의사다. 그러나 웬만한 환자는 받지 않는다. 돈이 아주 많거나 고관대작들이 그의 고객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고객이었고 해방 후에는 권력층이나 재벌 축에 드는 사람들이 고객이었다. 돈 없고 힘 없는 조선인은 아예 검진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건성으로 했다.

일제강점기에 이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황국 신민이었다. 왜정으로부터 '국어상용의 가(國語常用의 家')라는 이름을 획득, 대문에 걸어놓곤 했다. 잠꼬대도 일본어로 할 정도로 철저하게 일본인이 됐다. '국어상용의 가'로 지정된 덕분에 일본인과 교제도 쉬웠고 이런저런 혜택도 많이 받았다.

해방이 되고 소련군이 진주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친일파로 체포돼 죽기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일투사 치료 거부 등 총살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초주검이 되도록 두들겨 맞거나 총살됐다.

이인국 박사는 살길을 모색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출감하면서 노어(러시아어) 회화책을 두고 갔다. 이인국 박사는 죽을 힘을 다해 그 책을 읽었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 감옥에 이질이 번지기 시작하자 이인국은 자신이 의사임을 밝혔고, 치료 작업에 나섰다. 당장 죽을 위기는 모면한 것이다.

이인국 박사는 러시아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두마디 말을 할 줄 알게 되자 소련군들을 만날 때마다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가끔씩 병원을 순시하는 고급장교 스텐코프는 왼쪽 뺨에 오리알만한 혹을 달고 있었다. 이인국 박사는 그 혹에 자신의 살길이 있음을 알았다.

어느 날 이인국은 스텐코프에게 말 절반, 손짓 절반으로 혹을 수술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급기야 통역을 중간에 두고 수술 계획에 대해 자세한 의사를 전달했다. 수술은 성공했다. 완치되어 퇴원하는 날 스텐코프는 이인국 박사의 손을 부서져라 쥐면서 외쳤다.

"꺼삐딴 리!"

'까삐딴'은 영어의 Captain에 해당하는 러시아어다. 해방 직후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했을 때 '까삐딴'은 우두머리, 최고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 발음이 와전되면서 '꺼삐딴'으로 통용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진주하자 이인국 박사는 이번에는 미국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온갖 편의를 제공받으며 딸을 유학보내기도 했다.

소설 '꺼삐딴 리'는 '이인국의 처세술'을 꼬집는 소설이다. 이인국의 모든 행위와 생각은 살아남기 위한 타협이다. 그는 기회주의자이며 비굴한 권력지향형 인물로 그려진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한국전쟁, 미군 주둔 등 격동의 세월 속에 살아남기 위해 이인국은 처세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2000년대 한국 서점가에 '이인국'씨가 활보한다. 일제강점기도 해방정국도 전쟁시기도 아니지만 처세술과 관련된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잘 팔린다. 대형서점에서 발표하는 베스트셀러를 분석해보면 처세나 자기계발 관련 서적 수가 압도적이다.

6월까지 매달 집계된 베스트셀러 20위권 안에 자기계발, 처세 관련 서적은 4, 5권이다. 2008년 연간 베스트셀러 20위 안에도 자기계발, 처세 관련 서적이 5권이다. 범위를 넓혀 토익이나 토플 및 개인투자관련 서적까지 자기계발 서적에 포함한다면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10권에 이른다. 2007년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자기계발, 처세, 재테크 관련 서적은 9권이었다. 2006년 상황도 엇비슷했다.

특히 요즘 나오는 자기계발, 처세 관련 책들은 '마음공부' '자기수양'이라기보다 구체적인 생존전략, 구체적인 행동요령에 가깝다.

처세나 자기계발 관련 서적이 우리나 독서시장의 독립 영역이 된 지는 10년쯤 된다. 이전에는 자기계발 서적이 많이 출판되지 않았고 출판되어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자기계발, 처세 관련 서적은 한 권도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못하거나 오른다고 해도 1년에 1, 2권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8년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양상은 조금씩 달라졌고 2003년부터 베스트셀러로 대약진하기 시작했다.

자기계발이나 처세 관련 서적이 잘 팔리는 현상을 '독서문화의 천박화'로 볼 수는 없다.

김성미 원장(마음과 마음 정신과 의원)은 "약육강식, 승자독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개인들이 살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직장은 더 이상 평생고용을 보장해주지 않으며, 사회보장제도는 약자를 완전하게 배려해주지 않는다. 기댈 곳 없는 개인들이 자기계발, 자기무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그러나 보여지는 모습, 즉 외적 성형에 대한 집착은 내적계발을 등한시하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는 좋은 책이냐 아니냐를 떠나 독자들이 많이 찾는 책을 의미한다. '처세술' 혹은 '자기계발서'가 잘 팔린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이인국 박사가 살았던 그 살얼음 같은 세월을 살고 있다는 말일까?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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