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분노해야 할 '지방의 자존심'

입력 2009-06-17 10:46:21

"넌 시골에 언제 내려가니?" "시골?"

"집에 안 내려가?" "집에는 가는데 시골은 안 가."

20여 년 전 대학 재학 시절, 여름 방학이 다가올 무렵 한 서울 친구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그 당시 친구에게,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죄는 '헤드록'을 걸고 싶었다. 그 녀석이 대한민국 3대 도시 대구를 '시골'로 무시했기 때문이다. '헤드록'을 걸지는 않고 한마디 쏘아주었다.

"야 임마, 너는 서울 빼면 다 시골이냐."

그 친구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대부분의 서울 친구들도 서울을 제외한 대구나 부산, 광주 등 대도시를 '시골'로 부르기 일쑤였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대구의 인구는 얼마이며 서울만큼 각종 시설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살 만한 대도시라고 설명해도 한가한 황소처럼 눈만 끔벅거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난 대구에 안 가봐서 잘 몰라."

이 정도 되면 속으로 '그래, 잘났다. 이 우물안 개구리 같은 서울 촌뜨기들아' 하고 말았다. 하기야 그 순박한 서울 친구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나 싶다. 서울을 세상의 중심으로 알고 살던 그들이 더 넓은 세상을 알기에는 어렸을 수도 있었으니까.

요즘도 일부 서울 사람들이 다른 대도시를 '시골'로 부르는지는 모르겠다. '시골'보다는 '지방'으로 부르는 것 같다. '지방'은 특정 지역을 일컫는 말로 서울도 '서울 지방'일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서울'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통용되는 듯하다. '대구'의 입장에서도 도시화가 덜 된 농촌 지역을 '지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난달 말 헌법재판소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서울말'이 표준어라는 합헌 판결을 내렸을 때 서울 사람이 아닌 대구 사람으로서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합헌 의견을 낸 헌법재판관들이 그럴듯한 법리적 해석을 내렸지만 거기에는 서울 중심의 편협한 사고가 내재돼 있음이 느껴졌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10월에도 당시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수도 이전의 근거 법률인 '신행정수도의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수도가 서울이라는 불문의 '관습헌법'을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렸었다. 서울이 조선시대 이후로 수도였다는 점을 들어 국내 법 체계상 생소한 '관습헌법'으로까지 해석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당시의 법 해석도 서울 중심적 사고의 소산이라고 하면 틀린 지적일까.

이렇듯 서울 중심적인 사고가 빚어지는 것은 역사적 흐름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오랜 세월 동안 개성과 서울을 수도로 하는 중앙집권 정치체제가 지속되고 굳어지면서 서울 중심적인 사고가 전국적으로 굳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지방균형발전과 지방분권정책이 이명박 정부 들어 주춤하고 있지만 거기에 대해 별다른 목소리는 없는 것 같다. 서울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에서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에 대해 주눅 들거나 얌전하다. 가끔 반발하지만 체념하거나 당연히 여기며 오히려 서울 중심의 세계에 속하고 싶어한다.

이제는 서울 중심의 세상에 분노할 수 있어야겠다. 지방민의 의식에도 깊숙이 박힌 서울 중심적 사고의 뇌를 깨끗이 씻어보자. '서울'을 일컬어 '중앙'으로 부르는 것은 어떤가. 서울이 '수도'로 행정적 중심 기능 외에 현실적으로 경제적, 문화적 중심 기능도 하지만 '수도'이거나 '서울'이지, '중앙'은 아니다. '서울특별시'라는 정식 행정지명은 어떠한가. 정말 오만한 지명이 아닐 수 없다. 서울이 특별하다고? 서울특별시의 '특별'이 제주특별자치도의 '특별'처럼 다른 지역보다 특별하다는 것이 아니라 행정구역상 별도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지만 '특별'이라는 낱말이 지닌 귀족적 느낌은 거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서울에서는 수도권의 소득이 비수도권의 소득보다 높은 일부 유럽 선진국들의 예를 들며 우리나라도 수도권에 더 많이 투자, 소득을 높임으로써 비수도권을 이끌어가는 성장 동력으로 삼자는 논리도 나오고 있다. '서울 기득권'의 뻔뻔한 논리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중심의 세상에 분노할 수 있어야 그만큼 지방의 발전도 앞당겨진다. 그런데 서울에 대해 대구는 지방인가? 서울은 서울일 뿐이고 대구는 대구이다. 김지석 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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