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동에서] 합의 없는 토론을 경계함

입력 2009-06-15 06:00:00

주말 밤 TV 채널을 돌리다 만나는 토론 프로그램은 아무리 봐도 전파 낭비다. 기껏해야 진행자, 참석자의 개인적 유명세나 더해줄 뿐 사회적 공헌도는 마이너스다. 특정 사안에 대해 찬반 입장을 명확하게 가른 뒤 시종일관 서로 비판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건 결코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다.

토론과 논쟁이 민주화 척도 중 하나라는 인식은 주말 밤 100분으로도 모자라 밤샘 프로그램으로 편성하는 '만용'을 보여주기도 했다. '끝장토론'이라는 표현도 그때 나왔다. 하지만 100분을 주든, 끝장을 내라고 하든 타협점을 찾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의견을 굽히는 일을 협잡이라고 부르는 천박한 토론문화는 합의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 이런 식의 토론이 최선의 방책인 양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 토론 수업을 예로 보자. '머리카락 길이 자유화'를 주제로 줬다면 대개 이런 장면이 연상된다. "우리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찬성 토론과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는 반대 토론이 몇 차례 되풀이되다 교사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수업을 정리하는 모습. 교사는 투표를 통해 다수결을 시도할 수 있다. 투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앞세워 무력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이 그대로 학교 수업에 투영되는 책임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정치인들에게 있다. 대화한다면서 싸움판만 벌이고, 합의했다면서 금세 뒤통수를 쳐대는 건 국민에 대한 배임 행위다. 주말 밤마다 토론 프로그램을 편성해온 방송사, 적당한 토론과 주장할 권리만 중시해온 교육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달구벌대로 경산~성서 23.7㎞ 구간에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겠다는 대구시의 발표가 더없이 반갑지만 '시민 여론 수렴'이라는 단서가 마음에 걸리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시민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정책을 추진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듣는 건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최선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절차가 아니라 각기 다른 입장들을 대립시켜 정책 결정의 책임을 피하는 빌미를 만들려 한다면, 이는 민주주의를 우롱하는 일이다.

우리는 많은 정치행위들에서 이런 수작들을 지치도록 봐왔다. 실현 의지가 강한 정책은 요식행위 수준의 공청회와 여론 수렴 절차를 거친 뒤 재빨리 추진하지만, 골치 아픈 문제들은 찬반 다툼을 시킨 뒤 나 몰라라 하는 식이다.

대구시 역시 같은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한일극장 앞 횡단보도 설치 건만 봐도 그렇다. 합의를 이끌어내려 노력하기는커녕 찬반 다툼을 가만히 지켜보다 내년에 다시 여론을 듣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린 건 무소신'무개념 선언과 다를 바 없다.

달구벌대로에 자전거 전용도로를 설치하자는 의견은 지금까지 여러 곳에서 제안됐지만 대구시장을 비롯한 관련 공무원 상당수가 승용차 교통 불편, 안전 등의 문제를 들어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전용도로 추진 계획에 붙은 한 줄의 단서를 의심하는 건 이 때문이다. 대구시 교통정책의 궤도 수정이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하겠지만 주말 밤 TV토론 프로그램처럼 던져버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면 만만찮은 역풍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김재경 사회1부 차장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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