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로 읽는 한권]

입력 2009-06-10 06:00:00

30대의 김용은 정의감에 불타는 작가였다. 그는 첫 소설 '서검은구록'을 통해 만청 정권의 부당함을 설파하는 한편, 건륭제의 위구르 정벌이 '명분 없는 전쟁'임을 강조한다. 주인공 진가락과 그를 따르는 홍화회의 군웅들은 '한족의 독립'뿐 아니라 '위구르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들인 것이다. 뒤이어 나온 '벽혈검'이나 '설산비호' '비호외전'등의 소설에서도 그의 역사관은 선명하다. 그는 이자성의 농민 봉기를 옹호하며, 후금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던 원숭환을 최고의 영웅으로 치켜세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영웅문 3부작'에서도 그러한 경향은 계속된다. 명장 '악비'를 떠올리게 하는 항몽 전사 곽정, 그리고 탈권위를 상징하는 자유인 양과, 항상 소수자들의 편에 섰던 정치적 혼혈아 장무기 등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무협소설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들이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싸우고 어설픈 기회주의자들을 응징했을 때, 부귀를 보장해주는 승자의 편을 떠나 정의로운 패자의 대오에 합류했을 때, 김용은 젊었고 그의 작품은 세계를 감동시켰다.

'천룡팔부'를 거쳐 마지막 소설 '녹정기'에 이르러도 김용의 작품은 여전히 '재미'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약자의 편에 서지도, 정의가 패배한 역사에 통탄하지도 않는다. 김구가 테러리스트로 전락하듯이, 소설에서 목숨을 걸고 반청복명을 외친 의사들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고지식한 자들로 폄하된다. 일제와 친일파들이 오늘날 당당하게 조국 근대화의 공로를 인정받듯이, 강희제의 영토 확장과 그 정복에 협력한 자들이 오늘날 '하나의 중국'을 만든 선각자들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나이 든 김용은 이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지배하든 백성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으면 그만 아닌가.' 영화 '영웅'의 감독 장이머우가 장단을 맞춘다. '진시황은 부당한 권력자지만 천하를 위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태평성대'와 '천하'를 먼저 생각하지 않은 김용의 주인공들은 대개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다. 곽정과 소봉은 자결했고, 양과는 팔이 잘렸으며, 원승지는 조국을 떠나야 했고, 호비와 영호충, 진가락은 사랑하는 여인과 사별해야 했다. 반면 '태평성대'와 '천하'를 모토로 내걸고 대세에 편승했던 '녹정기'의 위소보는 마누라 7명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간다. 현실은 안타깝게도 무협소설 속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밥이나 먹고살려면 '태평성대'와 '천하'의 논리에 암묵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승자의 편에 쓸쓸히 서 있다. 다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산 위소보'보다는 '죽은 곽정'을 더 사랑할 뿐이다.

나에게는 일곱 명의 꽃과 같고 옥과 같은 부인들이 있소. 황상께서는 홍복제천하시고, 이 위소보는 염복제천한 것이오. 우리 군신 두 사람은 각기 장점을 갖추고 있는 것이외다. 『녹정기』중 위소보의 말/김용 지음/중원문화

대칸, 사람이 죽어 지하에 묻히는데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합니까? 『사조영웅전』중 곽정이 칭기즈 칸에게 한 말/김용 지음/김영사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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