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 너무 오래된 숙제

입력 2009-06-01 06:00:00

'김씨표류기'는 'HELP~(도와주세요~)'라는 우스꽝스러운 단말마에서 시작해 'HELLO!(안녕하세요!)'라는 기묘한 이중창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이다. 기발하고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동화를 늘어놓다가, 문득 뭇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어 놓고는 슬그머니 기막힌 사랑가로 매조지는, 웃기고 울리는 이야기인 셈이다.

영화 소개란의 한 대목처럼, 타의이든 자의이든,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밤섬이든 방 안이든, 극심한 고독 속에 표류하는 두 '김씨'가 서로서로 소통을 위하여 벌리는 고군분투기다. 그동안 하도 귀가 따갑도록 들어오다 보니, 되레 귀가 먹먹해져서 그만 무덤덤해져 버린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이야기를 또 끄집어낸 것이다. "수많은 안부 인사와 흔해 빠진 자기소개 같은 말들에 우리의 의지와 진심은 과연 얼마만큼 담겨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져서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라는 감독의 이야기처럼, 너무나 익숙하여 되레 잊어버리고 살아가던 주제를 무겁지 않게 풀어내려고 애쓴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따지고 보면 남자 김씨는, 온통 'HELP~'라는 말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떠밀려서 표류하게 된 셈이다.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며, 애인에게서 매몰차게 차이고, 무얼 좋아하고 잘하느냐고 물어보지도 않고서, 다짜고짜로 당장에 '도움'을 줄 능력을 내어 놓으라며 다그치는 회사에서 쫓겨난다. 집요한 유령은 김씨가 쫓겨 온 섬까지 따라와서 "고객님이 어디에 계시든, 무엇을 원하든 다 도와주겠노라"라고 폰을 통하여 지칠 줄 모르고, 저 혼자서 잘도 주절거린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물어보지도 않고서, 일방적으로 말이다. 정말, 어느 누구라도 "HELLO!"라고 딱 한 마디, 인사라도 먼저 건네주면 왈칵 눈물이 다 쏟아질 텐데.

"내 고민을 모두, 당장에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다! 단지 먼저 물어주거나 귀담아서 들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내 곁에 없다는 것에 절망한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이들의 유서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절절한 절규다. 불통으로 빚어진 파국의 불똥이 발등에 떨어진 뒤에는 이미, 너무 늦다. 미리미리 준비하고, 끈기 있게 가꾸어나가야 한다. 다 알고 있는 진부한 이야기라고들 생각하기에, 더더욱 새롭게 되새겨야 보아야 할 우리들의 숙제다. 사랑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듯이, 소통도 언제라도 불쑥, 되는 것은 아니다.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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