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점 남자의 세계? "숨겨진 괴로움마저 즐겨야죠"

입력 2009-05-30 06:00:00

▲ 대구 장산초교 4학년 담임 중 청일점인 최원진 교사가 여성 담임들 속에 둘러싸여 재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
▲ 대구 장산초교 4학년 담임 중 청일점인 최원진 교사가 여성 담임들 속에 둘러싸여 재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
▲ 피겨 대표팀 청일점 김민석 군.
▲ 피겨 대표팀 청일점 김민석 군.

홍일점 세상에서 청일점이 더 흔한 세상으로. 가히 여성파워 시대다. '여자가 어디서', '집에서 애를 봐야지'란 시대에서 세상이 크게 바뀌고 있다. 똑똑하고 능력있는 여성들 사이에서 남자들이 한없이 작아지기도 한다.

동물의 세계로 가보자. 수컷 사자는 드넓은 초원에서 항상 당당하다. 혼자 다닌다. 무리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는 위엄을 드러내며 나타나 해결하고, 큰 사냥감이 도망을 쳐도 무리를 제치고 달려가 일격필살을 가하고 남은 일은 암사자 무리들이 처리하도록 한다. 수컷의 남성다운 매력이자 위력이다.

하지만 인간세상에서 여성의 파워는 점점 커지고 있다. 현 시대를 돌아보면 이젠 남자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고 여성들은 홀로 더 당당하다. 여성의 눈치를 보며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세태가 도래한 것. 홍일점은 드물어지면서 더 당당해지고, 청일점은 흔해지면서 더 왜소해지기도 한다. 이 시대에 청일점으로 사는 남자들의 세계를 엿봤다. 그 달콤함 속에 괴로움이 묻어있다.

◆8분의 1, 청일점 교사

장산초교 4학년3반 담임 최원진(34) 교사는 미혼의 청일점. '좋겠다, 하지만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25일 그를 만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달콤함도 있지만 괴로움이 더 크다. 최 교사는 "장점도 많지만 아무래도 말과 행동도 조심하게 되고, 혹시 다른 교사와 마찰이나 갈등을 빚게 되면 해결이 난감하다"고 털어놨다.

실제 그는 4년 동안 이 학교에 있으면서 서너번 오해를 살만한 일이 있었는데 정말 괴로웠다고 했다. 남자 같으면 술 한 잔하거나 화끈하게 털어놓고 오해를 풀면 되는데, 여교사에게는 그게 쉽잖기 때문. 이후 그는 철학이 생겼다. '오해를 살만한 일은 최대한 하지 말자'.

1·2학기 중간·기말고사 등 1년에 4차례 시험지가 도착할 때는 그가 힘쓰는 날. 아무래도 남자다 보니 무거운 시험지를 드는 것은 당연한 것. 주변 여교사들도 자기 몫은 하지만 아무래도 남자다 보니 그보다는 몇 배 더 일해야 '일 좀 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혹시라도 주변 여교사와 함께 학생들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학생들이 '와! 사귄다'고 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그는 "남자 교사가 너무 없다보니 아무래도 혼자 머쓱한 때가 많다"며 "학생 수련회나 야유회 때도 운전과 짐나르기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최 교사는 특유의 밝은 웃음과 넉살로 여교사들과 잘 융화하고 있다. 남학생들이 장난이 심하거나 말썽을 피우면 남자의 특성이나 심리를 얘기해줘 좋은 상담자 역할도 해주고 있다. 또 혼자 남자다 보니 학생들에게 '인기 짱'이다.

현재 장산초교에는 남교사가 5명뿐이다. 1~3학년은 전체가 다 여교사며 4학년엔 최 교사가 청일점이고, 5,6학년에는 남자 교사가 2명씩 있다. 하지만 걱정이다. 남교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기 때문. 최 교사가 이 학교에 발령난 4년 전에는 남교사가 8명이었는데 지금은 5명으로 줄었다. 내년에는 또 1명이 군대 가고 3명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 해 새로운 교사 중 남자가 몇 명일지는 초미의 관심사다. 김주범 교감은 "남 교사 기근현상이 갈수록 더하다"며 "어떤 학교는 전체 교사 중 남자가 1명뿐이어서 남교사도 여성화되어가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우려했다.

◆여성들 속에 둘러싸인 남자

그렇다.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해야 하는데 여성들의 기에 눌려 어깨펴고 살기 힘든 환경에 처한 남자들도 꽤 있다. 대구산업정보대학 피부건강관리과 1학년에는 정원 79명에 남자는 1명이다.

이 청일점 학생은 입학 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교에서 보기 힘들다. 이 학교 관계자는 "2학년에는 그래도 남학생이 8명이나 돼 이들끼리 서로 모여다니며 잘 지내는데, 이 청일점 학생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더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직접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이 학생과 속내를 들어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국회의원 방에도 홀로 남자가 있다. 한나라당 여성 비례대표 강명순 국회의원 방. 이 방에는 강 의원을 포함해 모두 9명이 한 팀인데, 이중 김윤성 수행비서만이 남자다. 그러다보니 이 수행비서는 아무래도 행동이 멋쩍다. 술 한 잔 하고 싶어도 참고 집에 가서 혼자 술을 마신다. 음식도 마찬가지. 강 의원이 싱거운 음식을 좋아하다보니 식성도 맞추고 있다. 다행히 강 의원이 김 비서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따로 '맵게 해달라'고 주문해주는 것은 상당한(?) 배려인 것.

김 비서는 "일에 대해서는 남녀 구분이 없지만, 아무래도 물건을 옮기거나 할 때는 제가 일을 해야한다"며 "속상할 때는 다른 방 남자 보좌진과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 비서와 함께 일하는 서유진 여비서는 "대다수 여자다 보니 혼자인 남자가 아무래도 불편한 점이 있겠지만, 잘 어울려주기 때문에 우리 방은 의원회관 내에서 팀웍이 좋은 방"이라고 추켜세웠다.

◆곳곳에 청일점, '힘내라'

청일점이 홍일점을 압도하는 시대다. 이제 청일점도 당당해지고 더 돋보이고 싶어한다.

200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 첫 도전장을 내민 피겨 대표팀의 청일점 김민석(16·불암고)군. 김군은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센터 메인링크에서 남자 싱글 공식훈련을 치렀다. 세계랭킹 125위인 김군의 일취월장(日就月將), 괄목상대(刮目相對)를 기대해본다.

올해 KBS 신입 아나운서에도 청일점 매력남이 합격했다. 도경완(26) 아나운서는 363대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합격했는데, 4명 중 유일한 남자사원이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지만 이제 여성 아나운서들 속에서 당당하기 위해 재치와 유머감각을 갈고 닦고 있다.

시대상의 반영인지 인터넷에선 청일점 남자 공략법까지 등장하고 있다. 여성들이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직장에 들어간 청일점이 마음에 쏙 들 경우 이 남자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공략법이 필요하다는 것. 청일점의 마음을 뺏기 위해서는 일단 차별화 전략이 최고라고 한다. 남들이 'Yes'라고 할 때 당신은 'No'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첫째, 여러 여자들이 그를 칭찬할 때 침묵을 지키다가 절묘한 반언을 던져라. 예를 들면 '몸매가 좋다구? 그런데 턱선이 너무 두루뭉실한 것 같지 않아?'. 둘째, 그가 딴 곳을 볼 때 한 번씩 뚫어지게 쳐다봐라. 분명히 보지 않아도 당신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셋째, 길을 갈 때나 헤어질 때 우르르 다른 무리에 동참하지 말라. 교묘하게 그와 같은 방향이나 둘이 남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라.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이채근기자 mincho@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