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 → 대통령 → 검찰조사 '영욕의 63년'

입력 2009-05-23 11:55:27

실패와 시련, 정치적 부침 속에서 성공가도를 달려온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일생은 오뚜기와도 같았다. 어려운 가정환경, 상고 출신이라는 핸디캡을 딛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로서의 순탄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1988년 정치권에 뛰어들면서 역경의 반복은 시작됐다. 가난한 서민의 아들로 출생해 청문회 스타로 국민적 사랑을 받으며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퇴임과 함께 불거진 비리혐의로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다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고 말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23일 오전 서거한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에서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의 형제자매로는 큰형 영현(英鉉)씨와 둘째형 건평(建平·구속)씨, 누나 명자(明子)씨, 여동생 영옥(英玉)씨가 있다. 그의 두 형은 1967, 1968년 각각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세무공무원이 됐다. 김해 진영읍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진영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졸업했다.

서민 가정에서 성장한 노 전 대통령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1군사령부에서 부관부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노 전 대통령은 군 제대 후 고향에서 부인 권양숙씨와 1973년 1월 결혼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를 낳았다.

고졸 출신에게 사법고시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그는 두 차례 낙방 끝에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유일한 고졸 출신으로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노 전 대통령은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지만 7개월만에 그만 두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이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혐의로 대학생 20여명을 기소해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부림사건(釜林事件)' 변론은 노 전 대통령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학생, 노동자 등이 연루된 각종 인권사건에 뛰어들어 점차 인권변호사로 인식됐다. 특히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가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에 연루됐다가 제3자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청문회 스타'= '인권 변호사'라는 수식어를 달고 제도권 정치에 투신한 노 전 대통령의 첫 출발은 성공적이었다.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발탁,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통일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 국회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져 단숨에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노 전 대통령의 대표 가치인 '원칙과 소신'이 처음으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원칙과 소신'은 커다란 자산이면서도 노 전 대통령을 비주류의 길로 이끌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 때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 권유를 뿌리친 이후 부산에서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하는 등 '삼수'를 맛봐야 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당선 확률이 희박했지만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워 연이어 출마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바보 노무현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노 전 대통령은 2000~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16대 대통령 당선=민주화 세력을 기반으로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특히 2002년 노 전 대통령의 대선 도전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설 때만 해도 노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선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개혁과 변화의 바람을 내건 노 전 대통령은 광주에서 진행된 경선에서 '광주의 선택'으로 경선 1위를 차지한데 이어 그 여세를 몰아 '노풍'(盧風)이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당시 투표 하루 전날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일방적인 지지철회로 후보 단일화는 깨졌지만 당시 노사모 등 팬클럽의 지지를 얻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에 당선, 정상에 우뚝 섰음에도 원칙과 소신에 기인한 노 전 대통령의 시련은 이어졌다. 재신임 선언, 급기야 2004년 탄핵에 이르기까지 고비고비의 연속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2월 판사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뒤 검찰의 불만을 받자 검사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평검사와의 대화를 마련했지만 오히려 불신이 깊어졌다. 이어 노 전 대통령은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국정·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04년 3월12일부터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한 5월14일까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다. 권력기관 중립화를 비롯한 권위주의 해체, 헌법만큼 바꾸기 힘든 부동산제도, 한미관계 재정립, 자주국방, 햇볕정책 승계에 따른 남북 정상회담, 대연정 선언 등은 엇갈린 평가 속에서도 '노무현다움'의 결정판이었다.

재임기간 중에는 안희정씨와 최도술씨 등 386세대로 불려진 측근들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수감됐다. 청와대에서 집사로 불렸던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역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과 노 전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천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수감됐다.

◆피의자 신분으로 전락=노 전 대통령은 퇴임후 1년만에 자신을 지탱해준 기둥인 '도덕성'의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노 전 대통령은 물론 가족들도 비리연루 의혹에 휘말려 검찰에 소환됐다.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가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59·구속)씨로부터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명목으로 29억6천300만원을 받아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도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 대통령 가족이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했다.

노 전 대통령과 검찰 사이의 진실공방의 결과를 뒤로 하더라도 피의자 자격으로 검찰에 출두, 도덕성의 기반이 허물어진 셈이다. 그동안의 정치적 시련이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지만, 이번 검찰 소환조사는 촌부로서의 삶을 바랐던 노 전 대통령에게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가 됐다. 조만간 검찰의 재소환을 앞두고 23일 오전 경남 김해 봉하마을 자택 뒷산 언덕에서 투신,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서거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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