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봄, 광주를 잠시 되돌아본다. 그 당시 내 기억 속의 5월은 푸른 하늘을 수놓은 고무 풍선과 달성공원, 그리고 공원 앞에 줄지어 늘어선 중국집의 자장면만이 선명하다. 정치와 경제란 단어들은 마치 아버지가 밤새워 만들어 주시던 딱지 속 그 구김의 틈새에서나 살아 숨쉬고 있었으며, 이후 혹독한 성장의 고통 속에서도 광주에 대한 기억은 아주 사소하고 단편적이어서 솔직히 그다지 내세울 만한 게 없다.
나에게 '광주'가 최초로 그 엄숙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8년, 그러니까 대학 1학년 春鬪(춘투)가 절정에 달한 때였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이런 구슬픈 노랫가락과 함께 교정 안 민주광장에서는 광주에서의 참혹한 광경을 담은 기록 사진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 좁은 공간 속에는 진압봉에 머리가 터져버린 고교생, 알몸으로 울부짖는 여대생,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린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난 그 사진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당시 대구에서 '광주를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카락에 빨간 물을 들이는 것보다 더 지난한 일이었다. '안전했던 대구'는 여전히 그 사건에 관해 배타적이었고 나 또한 나름의 문제로 인해 숨가빴다. 그렇게 초점은 빗나갔고, 명암은 흐릿하여 좀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후, 난 몇몇 의식 있는 지인들과의 교류로 인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서적과 사료를 세세히 접하게 되었고, 비로소 그 사건의 충격적인 진상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투박한 활자들은 한결같이 이 사건의 시원을 망국적인 지역 감정으로, 그 주범으로 대구경북의 패권주의를 지목하고 있었다. 풍수지리나 훈요 10조 같은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지역 감정에 관한 야사는 현재의 지역 감정(지역 차별)을 감추기 위한 위장술에 불과했으며, 지역 차별은 인사 차별을 낳고, 인사 차별은 지역 불균형을 심화시켰다라는 말은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그 사건의 본질을 향해 가까이 다가설 때쯤, 내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움트는 감동의 현시적 맹아는 터무니없게도 '알 수 없는 죄책감'이었다.
이런, 맙소사!
단지 대구에 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광주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야 하다니….
그러나 그나마 위안이 되는 논리도 있었다. 그것은 호남이나 영남 둘 다 지역 감정의 희생양이라는 여러 현학들의 지적이었다.
지역 갈등은 지역 감정의 갈등이 아니라 지배 모순을 중첩적으로 부과받은 특정 지역과 지배 집단 간의 갈등이라는 것, 즉, 다시 말해 전라도 민중과 경상도 민중 간의 갈등이 아니라 전라도 민중과 지배 집단 간의 갈등이라는 것이다.
1980년 5월 19일, 그날 광주에는 비가 내렸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줄기는 굵어졌지만 민주화를 향한 시민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고 한다. 그로부터 딱 29년이 지난 오늘, 난 마치 요식적인 행사처럼 한 손엔 펜을 들고 그 공포에 휩싸였던 도시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역시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물처럼 밀려든다. 단지 안전한 곳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도시에 대한 감동이 빈곤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물론 그럴 필요가 없는데, 어쩔 수 없다.
과연, 누가 내 마음의 광주를 불태워 버릴 것인가? 누가 내 가슴 한쪽에 눌어붙은 그 불온한 폭도들이 가득 살았다는 전설의 도시를 온전한 형태로 되돌려 놓을 것인가? 아! 그 물음은 마치 예전 나의 반쪽을 찾아 헤매던 힘든 여정처럼 아직까지도 아득하고 요원하기만 하다.
우광훈(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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