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나를 찾아왔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은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에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파블로 네루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찾아온다. 그래서 가슴에 홀홀 불을 피워 영혼을 따뜻하게 데운다. 시인 네루다는 '시가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사랑처럼 어느 날 문득 나를 찾아온 것이 시라는 말이다.
이쯤 되면 '누구나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된다'는 말이 이해될까. 사랑과 시는 한 집에서 태어난 오누이 같은 것이다. 누구나 사랑을 하게 되면 시를 쓰고 싶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을 하면 다른 세상이 보이고, 그렇게 보이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시다.
시에 대한 찬사, 사랑에 대한 찬가를 가장 아름다우면서 적절하게 표현하는 영화가 마이클 레드포드 감독이 1994년 만든 '일 포스티노'이다. 이탈리아 작은 섬의 집배원이 망명 온 유명한 시인에게 편지를 전해주면서 순수한 자아와 시심(詩心)을 발견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197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가 1952년 칠레에서 추방돼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 작은 섬에 기거할 때의 실화를 근거로 만든 작품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안토니오 스까르메따의 '불타는 인내심'이다. 소설 속에서는 집배원이 17세 소년이다. 영화에서는 30대로 나온다. 집배원 마리오를 연기한 이탈리아 배우 마시모 트로이지의 각색이다.
그는 이 영화의 주연과 각본을 함께 맡았다. 영화 촬영 직전 이미 두 번의 심장수술을 받았고, 영화를 찍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지만 그는 촬영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촬영을 끝낸 지 이틀 후 사망했다. 이 작품은 그의 유작이자 역작이다. 그의 영혼이 녹아들었다고 해야 할까. 그는 시를 배워가는 가난하지만 뜨거운 시골 집배원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해 관객들의 가슴을 시처럼 움직였다.
마리오는 섬에 살면서도 배타기를 싫어한다. 멀미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그는 이미 시심이 가슴속에 가득 찬 시인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대시인을 만나면서 물꼬가 터지고, 더구나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시의 춤을 추게 된 것이다. 대시인을 만나기 전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왜 그녀의 미소는 나비의 날갯짓 같을까. 왜 그녀의 미소는 장미요, 땅에서 움튼 새싹이요, 솟아오르는 물줄기 같을까. 바로 은유다. 미소를 미소라고 얘기하기보다 부서지는 은빛 파도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은유를 알게 되면서 섬의 모든 것을 아름다운 이미지로 그려내게 된다.
섬사람들이 하루 종일 끌어올려 생계를 유지하는 그물. 그는 거기에 수식어를 하나 더 달아 '서글픈 그물'이라고 표현한다. 고기를 잡는 그물이란 물질이 '서글픈'이란 이름을 달면서 삶의 애환이 섞여버리는 아주 근사한 표현이 된다. 시인이 밀물과 썰물이 바위에 부딪치는 모습을 보고 하소연한다고 하자, 그는 배가 단어에 의해 튕겨지는 느낌이라고 화답한다.
아마 이 영화에서 최고의 은유는 섬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으로 대신하는 장면이 아닐까. 네루다가 이 섬의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표현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베아트리체 루소!"라고 대답한다. 사랑하는 이의 이름이 아름다움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섬의 아름다움,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고유명사 속에 전부 녹아버렸다.
영화는 아름다운 음악과 풍경, 거기에 잊지 못할 은유로 인해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시처럼 그려진다.
망명 생활이 끝나 고국으로 돌아간 네루다. 이제 섬은 다시 쓸쓸해진다. 마리오는 유명한 시인은 아니지만, 자신의 영혼을 녹이는 시를 쓰며 네루다와의 우정을, 그리고 시를 생각한다. 섬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생각에 네루다가 남기고 간 녹음기에 소리를 담는다. 작은 파도, 큰 파도소리, 절벽에 부서지는 바람소리, 신부님의 종소리,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질 소리,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 소리, 그리고 베아트리체의 뱃속에 있는 아들의 심장소리….
살며 사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준 영화가 또 있을까. 모든 소리와 보이는 모든 것이 시가 되는 영화다.
'…/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순수한 지혜/ 그리고 나는 문득 보았다/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휘감아 도는 밤, 우주를/….'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 그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은유이다. '일 포스티노'는 시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섬을 달리는 마리오의 자전거 바퀴처럼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주의 별빛마저 나를 위해 빛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그 속에는 이미 시가 찾아왔다.
힘들고 각박한 세상 속 베아트리체 루소의 달콤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그리울 때 시를 쓰고 싶어진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