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책 읽기]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

입력 2009-05-14 06:00:00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을 읽었다. 발레리 줄레조는 프랑스 사람인데, 지리학 박사 학위 논문으로 한국의 아파트에 대해 썼다. 프랑스 사람이 보기에 우리나라의 아파트들이 상당히 특이하게 보였나 보다.

처음 한국의 아파트에 대해 쓰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고 한다. 지리학의 연구 대상으로 더 흥미로운 소재들이 많이 있는데 왜 하필 재미없는 한국의 아파트에 대해 연구하려고 하느냐며.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한국의 아파트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연구소재였나 보다.

19세기 말에 영국 왕립지리학자로서 조선을 방문하여 그 체험을 생생히 기록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100년 전 한국의 모든 것'을 읽으며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조선인도 남기지 않은 조선시대 후기의 일상사를 세밀히 관찰하고 기록한 그 철저함이라니.

발레리 줄레조도 지리학도로서 프랑스에서는 이미 매력을 잃어버린 주거형태인 아파트가 한국에서는 왜 이렇게 인기를 끌고 있는지, 이 어마어마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어떻게 대표적인 주거형태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연구자다운 호기심과 치열성으로 아파트단지를 누비고 다니며 인터뷰하고 조사했다고 한다.

저자는 먼저 서울의 도시정책과 아파트단지 개발의 역사를 연대별로 훑어본다. 1950년대 서울의 도시경관과 초창기 아파트의 출현, 1960년대의 도시 정책과 마포아파트의 등장, 1970년대 대규모 아파트들의 등장까지. 이 무렵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난장이 가족의 비극도 시작되었다. 198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아파트 열풍이 불었고, 1990년대에는 새로운 도시개발의 양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의 아파트는 10여 평대의 무척 작은 아파트였지만, 욕실과 화장실의 편리함 때문에 현대적인 주거형태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파트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아파트가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고 편리하며, 재산증식의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이다. 물론 그 바탕에는 아파트를 부유한 사람들의 주거지로 인식시키기 위한 건설회사와 정부의 홍보 전략과 정책적 뒷받침이 치밀하게 깔려 있었다.

저자는 연구자답게 객관적인 입장에서 아파트의 역사, 아파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문화 등을 조목조목 짚는다. 아파트의 소소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는 경비원들, 세대별로 격리된 문화 등. 프랑스에서 1950, 60년대 아파트단지는 중간계급의 젊은 세대가 거주했고, 얼마 후 이 계층이 단독주택으로 옮아가면서 가차 없이 버려졌다고 한다. 반면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상위 계층에서 시작되어 중간계급 일반과 하위계층으로 확산되었다. 정부가 주도하고 재벌이 공급한 대단지 아파트를 상층의 도시 중산층이 수용하게 되었을 때 한국에서 아파트 신화가 시작된 것이라고 본다.

나도 평소 궁금했다. 외국에는 빌라나 저층아파트가 많은데, 특히 부유층은 고급빌라단지에 사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아파트만 계속 지어지는지, 도심의 산과 하늘을 가리며 점점 높아져만 가는 아파트들이 대체 어디까지 높아질 것인지.

이 책을 읽으며 좁은 땅에 사람은 많이 사니까 별수 없지 않느냐는 결정론적 시각, 아파트는 편리하고 사람이 살기 좋다는 생각이 모두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국외자의 시선의 소중함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신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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