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인(仁)과 예(禮)

입력 2009-05-14 06:00:00

필자가 아둔한 실력으로 대학에서 동양화론(東洋畵論)을 강의할 때마다 프롤로그로 언급하는 것이 공자(孔子)의 '회사후소론(繪事後素論)'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이자 예술평론가이며 유교를 창시한 교육자이기도 한 공자(BC 551~479)가 설파한 인(仁)과 예(禮)는 인본사상(人本思想)으로 오늘날 우리네 생활 속에 뿌리박고 있는 데다 그가 회화(繪畵)에 대해 논한 두 가지 기록 중 하나가 바로 '회사후소론(繪事後素論)'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후에 시작한다는 뜻으로 인간 만사가 본질(本質)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비유하여 본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말로 후세에 널리 전하고 있다. 즉, 밖으로 드러난 형식적인 예(禮)보다 그 예의 본질인 어진(仁) 마음이 더 중요하므로, 형식으로서의 예는 본질이 있은 후에라야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세상의 모든 사물은 반드시 본질이 있기 마련이며 이 본질은 인(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질을 표현하는 형식이 바로 예를 드러내는 것이란 뜻이다.

일전에 인터넷을 통해 알게된 사실이지만 최근 유명세를 타고 있는 팝 아티스트 낸시 랭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살한 어느 인기 탤런트의 빈소에 찾아가 조문할 당시 숙연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색상의 의상을 입고 나타나 한동안 인터넷 여론을 들끓게 했다. 그 후 그녀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밝은 색깔의 의상을 입고 조문한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거기 조문객들이 입은 검은 정장은 하나같이 명품이었다"며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런 식으로 조문한 것은 오히려 순수한 게 아니냐"고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고 했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필자는 새삼 공자가 설파한 '회사후소'가 생각났던 것이다. 낸시 랭의 주장대로라면 굳이 검은 정장을 갖춰입고 조문하는 것은 겉치레의 예에 불과하고 비록 화려한 의상을 입긴 했지만 고인의 죽음을 진정 애도한 본인의 행동은 인의 실현을 중요시 했다는 뜻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런 황당한 행동은 아무리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닌 아티스트라고 해도 역시 경솔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누구나 일상의 삶에서 갖춰야 할 예(禮)는 인(仁)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각박한 세상에 때에 따라 인이 아닌 예만 갖출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날 고인의 빈소를 찾은 많은 조문객들이 비록 명품으로 치장된 예복을 갖췄다고는 하나 그들 마음속에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순수한 애도의 뜻을 전하지 않았다고 감히 재단할 수 있을까? 진정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인과 예를 실천으로 옮기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을….

이미애 수성아트피아 전시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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