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 6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했다. 고향 경산에는 집터만 남았다.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갔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자그마한 아이스크림 대리점을 열었다. 열심히 도왔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에 못 다닐 처지였다. 힘들었다. 고교를 마친 뒤 대구로 왔다. 대학에서도 학비를 벌기 위한 일들을 계속했다. 경산에서 양어장도 직접 운영했다. 아르바이트는 생활이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나갔다. 중1 때 한 선배가 켜는 바이올린 선율이 너무 아름다웠다. 선배에게 바이올린 연주법을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교회에서 열심히 배웠다. 대학에 들어가 관현악단(메디컬 챔브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가입했다. 6년 동안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요즘은 의료나 교회 행사 때 바이올린으로 트로트 등 대중가요를 연주해 박수를 꽤 받고 있다.
#고교 1년 때. 옆집 여학생이 너무 예뻤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짝사랑했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고 싶었다. 카메라가 없었다. 언뜻 스쳐본 얼굴을 상상했다. 그녀의 얼굴을 연필로 그려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미술학원을 다녔다.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두 달 만에 학원을 그만뒀다. 학원비가 모자랐다. 결국 그녀에게 말 한번 건네지 못했다. 그래도 얼굴은 계속 그렸다. 지금은 초상화를 그리는 데 5분이면 족하다.
#의과대학 시절. 병원 응급실에서 '위장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날, 난동이 벌어졌다. 멱살잡이와 고성이 오갔다. 환자들은 불안에 떨었다. 무서웠다. 말 한마디 못하고 움츠려 있었다. 폭력배로 보이는 이들의 행패도 종종 있었다. '울컥' 하면서도 눈길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환자를 돌보는 병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병원 난동'을 제압할 힘이 필요했다. 합기도 도장을 찾았다. 8년이 흘렀다. 이젠 합기도 3단이다. 불합리한 난동이나 폭력을 제압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약 7년 전. 환자들을 돌보며 환경과 건강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느꼈다. 먹다 버린 쓰레기, 각종 일회용품, 차량에서 나오는 배기가스 등등. 환경오염의 심각성에 관심을 갖게 됐다. 승용차 운전을 그만뒀다. 주로 걷거나 버스를 탔다. 주말과 휴일엔 자전거를 몰고, 가끔 지하철도 이용하고 있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종이컵, 나무젓가락 등 일회용품은 쓰지 않는다. 인체와 정신건강까지 해치는 환경오염에 문제의식을 갖고 대구환경운동연합 회원으로 가입했다. 지난해부터 환경문제에 대한 글을 이 단체 소식지에 꾸준히 게재해왔다. 올해엔 이 단체 운영위원으로 보다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게 됐다.
한병인(44·대구시 수성구 만촌동)씨. 신경과 전문의다. 그의 삶의 모토는 '홍익인간'이다.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 그래서 그의 주관심사는 의료이고, 환경이다. 환자를 치료하기 이전에 질병에 노출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승용차를 모는 대신 걷는다. 집과 의원에서 일회용품을 걷어냈다. 자그마한 실천이다. 그에겐 환경운동 실천가로 살고 싶은 열정이 강했다.
건강을 위해 11층 사무실을 오르내리는 데 승강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집에서는 TV를 보지 않는 대신 책을 본다.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건강도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명약이나 명치료법은 질병에 걸리고 난 뒤의 얘기다. 그렇다고 본업인 의료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전문의가 된 뒤 7년 동안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에 등재된 논문만 4편을 냈다. 뇌졸중 위험인자를 규명하는 뇌혈류 검사를 비롯해 어지럼증, 이명현상 등에 관한 내용이다. 인체 기생충을 주제로 한 석사논문을 제출한 데 이어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다양한 삶의 경험은 그를 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 바이올린 연주자, 합기도 유단자, 초상화가로 이끌었다. 대구 반월당 반월메디칼타워 11층 두(頭)신경과에서 '멀티 플레이어' 한씨를 만났다.
◆초상화, 짝사랑에서 기쁨치료까지
-초상화를 오랫동안 그렸는데.
"고교 1년 때 옆집 여학생 얼굴을 그리기 시작해 지금까지 잇고 있습니다. 대학시절 축제 때마다 목탄으로 '1인 5분 초상화'를 그려주고 2천원씩 받았지요. 약 200점을 그렸는데, 4학년 때는 전시회도 가졌습니다."
-장점이 있습니까.
"초상화는 사람 표정이나 해부학에 대한 지식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신경과 지식이 도움이 됩니다. 요즘은 두통, 우울증, 불면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드립니다. 기쁨을 주는 치료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활용할 계획입니까.
"6월 23일부터 30일까지 건물주의 승낙을 받아 반월메디칼타워 계단에서 초상화 전시회를 가질 계획입니다. 지난달 19일 시내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열린 지구의 날 행사 때 시민들을 상대로 5분 초상화를 5시간 동안 무료로 60여점을 그려줬습니다. 이를 포함해 환자 초상화, 대학 때 그린 초상화를 합쳐 건물 계단에 내걸려고 합니다. 색채심리와 관련한 그림도 함께 전시할 계획입니다. 계단을 10층 이상 오르내리면 운동도 되겠지요. 환자들에 대해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도 계속할 것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건강, 바이올린 & 합기도
-바이올린은 어떻게 배워 활용하고 있나요?
"중1 때 교회에서 처음 배운 뒤 대학 관현악단 동아리에서 6년 동안 연주하면서 실력을 키웠습니다. 최근 '대구시 고혈압·당뇨병관리사업단설명회'에서 대중가요를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딱딱한 설명회를 부드럽게 만드는 데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행사 때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심수봉 노래 등 트로트를 연주합니다."
-합기도는 어떤가요?
"당초 병원 응급실 난동을 보고 이를 제압할 힘을 얻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벌써 8년째인 데 당초 의도보다는 자신감과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국민생활체육 대구시합기도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생활체육으로서 합기도의 저변확대를 위해 애쓸 것입니다."
◆뇌졸중과 어지럼증에 대한 관심
-왜 신경과 의사가 됐어요?
"뇌졸중, 어지럼증, 이명 등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신경과 중 수술을 하지 않는 내과계통입니다. 특히 연구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짬을 내고, 여러 활동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칼을 잡지 않는 내과 계통을 선택했습니다."
-뇌혈류검사와 관련해 책까지 냈는데.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비만, 흡연 등이 뇌졸중 위험인자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밝혀내는데 초음파뇌혈류검사가 중요하기 때문에 관심을 쏟았지요."
-진료 외에 의료관련 활동은.
"의학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의협신문 등지에 의료교육만화도 그리고 있습니다. 또 지난해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 지식iN에 대한의사협회 답변의사로 선정돼 게시판에 올라오는 신경과 계통의 질문에 성실히 답변하고 있습니다.
-논문과 글을 쓸 여유가 있습니까.
"걷거나 버스를 기다리며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퇴근 후에는 TV 대신 책을 보거나 글을 쓰지요. 시간을 잘 쪼개면 충분합니다."
◆삶의 질을 위한 환경
-왜 환경입니까.
"질병을 비롯해 인간 삶에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죠. 주변에는 환경을 오염할 수 있는 요인이 너무 많습니다."
-환경오염 방지를 위한 방법은?
"생활주변에서 시작돼야 되겠지요. 일회용품을 가급적 쓰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식이죠. 자동차 매연을 줄일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것도 좋은 실천입니다."
-개인적으로 어떻게 실천합니까.
"차를 몰지 않고,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7, 8년 전 대구환경운동연합에 가입했습니다. 환경과 건강에 관련한 글도 꾸준히 쓰고 있고요. 환경단체에서 활동하며 더 나은 실천방안을 고민해볼 생각입니다."
◆타인을 이롭게
-인생의 소중한 가치라면.
"진정한 삶의 가치는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가까이는 가족부터 이웃, 환자, 더 나아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이런 면에서 건강한 환경이 소중하다고 봅니다. 우리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질 겁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 한병인은?=1965년 경산 출생. 경북대 의과대 졸업. 부산대 의과대학원 석사. 두신경과 원장. 대구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 국민생활체육 대구시합기도연합회 회장. 대한의사협회 인터넷 네이버 지식iN 답변의사(2008년). 저서 '초음파 뇌혈류검사'(2004년) '욕창 치료 지침'(영문판, 2005년) '쉽게 배우는 어지럼증의 진단과 치료'(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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