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백두를 가다] 청송백자, 500년 역사

입력 2009-05-01 06:00:00

▲ 청송은 청송백자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가마와 사기움(공방), 사기장 생활관을 짓고, 조만간 청송백자를 재현할 계획이다.
▲ 청송은 청송백자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가마와 사기움(공방), 사기장 생활관을 짓고, 조만간 청송백자를 재현할 계획이다.
▲ 500년 역사를 가진 청송백자. 설백색의 접시와 사발은 500년 동안 서민들의 삶과 함께 했다.
▲ 500년 역사를 가진 청송백자. 설백색의 접시와 사발은 500년 동안 서민들의 삶과 함께 했다.
▲ 백자의 재료가 되는 도석을 빻는 기구인 디딜방아.
▲ 백자의 재료가 되는 도석을 빻는 기구인 디딜방아.

청송은 주왕산 역사바로세우기, 청송 의병정신 바로알기에 이어 청송백자 복원에 올인하고 있었다.

대학에 의뢰해 청송백자 지표조사를 마쳤고, 가마 복원도 마무리 단계였다.

청송이 백자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는 뭘까? 일행은 청송백자의 옛 흔적을 되찾기로 했다.

그 험한 청송의 고개를 몇 구비나 넘어 다다른 부동면 신점리 '법수골'. 새 단장한 가마굴, 사기움(공방), 사기장 생활관이 더 넓은 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백자가 나올 태세였다. 옛 청송백자의 흔적을 알리듯 크고 작은 수백개의 사기 조각이 터 곳곳에 널려 있었고, 가마터 뒤편에는 도석(도자기 원석)을 캔 광산이 옛 세월을 간직하고 있었다. 청송백자 500년 영광을 재현할 역사의 장이다.

일행은 가마는 있지만 청송백자를 본적이 없어 군이 보관하고 있는 백자부터 세밀히 살폈다. 화려한 것도 아니고,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청송이 백자 복원에 열정을 쏟는 궁금증이 시원스레 풀리지 않았다.

백자 복원을 맡고 있는 강병극 청송군 전략기획팀장은 "청송백자는 왕실에서 사용한 관요가 아닌 민요로, 서민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막사발'"이라며 "결코 화려하지 않기 때문에, 서민과 함께해 왔기에 관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강 팀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다시 백자를 두 번 세 번 들여다 본 뒤 청송백자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청송백자의 가치를 이해하게 됐다.

청송백자는 과거 서민들이 친근하게 사용하던 생활필수품이자 경북에서 널리 유통되었던 생활도자기다. 문경의 도자기와 함께 경북의 양대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래서 과거 꽤 유명세를 치러야 했다.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도자명고'에서 "전국에 산재해 있는 도공에는 계통이 있다. 그 선대의 출처를 물으면 광주, 청송, 문경, 부안, 고창, 봉산, 성천, 명천 등의 지역을 드는 경우가 많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조선 도자 계통의 굵은 축으로 청송백자를 인정하는 것으로 청송인들은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청송백자는 꽤 독특하다. 다른 지역의 도자기는 대개 '도토'라는 흙을 이용해 빚은 것이지만 청송백자는 '도석'이라는 돌을 빻아서 빚은 것이다. 그래서 일행이 궁금해 왔던 '왜 이렇게 희고, 가벼운 지'가 풀리게 됐다. 흙보다는 돌을 빻아 만든 도토는 점력이 약한 반면 내화력이 크고 흙에 비해 유난히 희다는 장점이 있다. 또 청송은 산간 오지여서 유통조건이 매우 열악, 등금쟁이(일종의 보부상)들이 등짐으로 그릇을 운반해야 했다. 그래서 무게를 줄이기 위해 그릇을 얇게 만든 것이다.

강 팀장은 "청송의 백자는 돌을 빻아 만든 것으로, 일본의 도자기 전문가들도 한국의 여러 도자기 중 그 원료의 출처가 가장 분명한 것으로 그 가치를 높이 사고 있다"고 설명했다.

청송백자가 언제 태어났는 지에 대해선 우리의 선조들은 민간 도자기를 하층문화로 여겨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의 웬만한 역사 문헌자료에선 청송백자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그나마 19세기 초반에 저술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 청송백자를 처음으로 청송지역의 특산물이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후 청송백자 생산에 대한 기록은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편찬한 '조선산업지'에 청송군내 3개 마을에 가마 수는 4개로 1년간 생산액을 500원으로 적었다.

청송군은 2005년 옛 문헌 등을 바탕으로 청송백자 가마터 지표조사연구를 실시했다. 연구 결과 청송내 36개소에 48기의 백자 가마를 찾았고, 시기적으로 16세기부터 청송백자를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확인했다. 청송백자 500년을 직접 밝혀낸 것이다.

청송백자는 화려하지 않다. 왕족의 볼거리가 아닌, 서민의 삶이 깃든 그들의 그릇이다. 그래서 청송인들은 청송인이 500년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청송백자를 꺼집어 내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종규기자 청송·김경돈기자 사진 윤정현

자문단 서점 병신창의 청송선열유족회 회장 강병극 청송군 전략기획팀장 황극노 청송군 공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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