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반까지 이탈리아의 실크산업은 유럽 최정상이었으나 18세기 들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영국의 섬유업자 토머스 롬브와 그의 이복동생 존 롬브가 있었다. 당시 영국도 실크를 생산하고 있었으나 품질이 조악했다. 문제 해결의 관건은 선진기술이었다. 하지만 베네치아와 볼로냐 등 최고급 비단을 생산하고 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기술자의 출국 금지, 기술 유출 시 사형 같은 엄격한 비밀 유지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 도입은 불가능했다. 롬브 형제는 기술도둑질로 문제를 해결했다.
격분한 이탈리아 비단길드는 여성 암살단까지 보내며 영국 실크산업의 발전을 저지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복동생 존 롬브는 독살당했으나 토머스 롬브는 살아남아 영국 실크산업을 번창시켰다. 이후 이탈리아 실크산업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 모두를 상실하면서 영국에 자리를 내줬다.
미국 산업혁명의 産婆(산파)도 기술도둑질이었다. 그 선구자는 새뮤얼 슬레이터와 프랜시스 로웰이다. 영국 출신으로 암기력이 비상했던 슬레이터는 자신이 일하던 섬유공장의 직조기 작동원리를 통째로 암기한 다음 미국에서 사업을 벌여 크게 성공했다. 그가 처음 세운 공장은 '미국 산업혁명의 발상지'로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로웰도 영국 직조기의 핵심기술을 암기해 미국으로 가져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세계 최초로 방적, 직조, 염색을 일관 공정으로 연결한 생산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것은 대성공이었고 영국과의 제조업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미국에 심어줬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최근 펴낸 자료에 따르면 국정원은 2004∼2008년 160건의 해외 기술 유출 사건을 적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술이 그대로 유출됐을 경우 경제적 손실은 올해 정부예산(283조8천억 원)에 육박하는 253조4천500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산업스파이는 기업이나 산업 차원이 아닌 국가 전체의 생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 간, 국가 간 사활을 건 기술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산업스파이는 21세기 가장 큰 산업 중의 하나"(앨빈 토플러)가 되고 있다. 성공만 하면 무한한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반면 도둑맞은 측은 18세기 이탈리아와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 개발만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시대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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