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제주 거문오름

입력 2009-04-23 11:16:21

얕은 산 올라 28만년의 깊은 속살 만나다

무릇 여행은 그 지역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명한 관광지를 훑고 다니는 여행에서 벗어나 그 지역에 충분히 스며들어 그들과 같은 호흡으로 그 땅을 느끼는 슬로(slow) 템포가 필요하다. 국내 관광지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제주도 역시 마찬가지. 유명한 관광지에 대한 욕심과 일상은 잠시 내려놓자. 그리고 빈 몸으로 '오름'을 올라보는 것은 어떨까.

제주는 오름의 섬이다. 오름을 오르지 않고서는 제주를 이야기할 수 없다. 진정한 제주의 깊은 속살이 오름에 있기 때문이다.

오름은 중세 국어로 '얕은 산'을 의미하며, 기생화산을 뜻한다. 제주에는 360여개의 오름들이 한라산 주변에 솟아나 있다.

거문오름은 한라산'용암동굴계'성산일출봉 등과 함께 2007년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됐다. 28만년 전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거문오름은 분화구에서 막대한 양의 용암이 뿜어져 나오면서 작은 산 모양이 만들어진 것이다.

거문오름은 주민들 사이에 예부터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곳이었다. 탐방로를 만든 것도 최근이어서 자연환경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 간직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3시간 남짓 걸리는 5㎞의 탐방로를 따라 오름을 오르면서 28만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거문오름의 초입에는 억새군락이 형성돼 있다. 가을에는 검은 땅과 대비돼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곳곳에 군락을 이룬 야생화도 빼놓을 수 없는 오름의 비경이다. 양지꽃'자주개불주머니'큰개불알꽃'제비꽃 등 정겨운 이름의 야생화를 만날 수 있다.

거문오름은 해발 456m, 지상높이 112m. 야트막한 야산에 불과하다. 높이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거문오름의 정상은 금세 만날 수 있다. 지형의 경사를 따라 북쪽으로 용암이 7㎞나 흘렀다고 하는데, 거문오름 정상에선 용암의 자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오름은 '정상등반'이 목적이 아니다. 오름의 비경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분화구 일대에 독특한 식생을 가진 신비한 곳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분화구 일대는 평평한 초지를 이룬다. 말을 방목했다는 드넓은 초원은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분화구로 가까이 갈수록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다. 분화구 안쪽 바위틈에선 한여름에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가 하면 오래된 바위에 이끼가 잔뜩 낀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곳에는 한겨울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어 꽃이 피기도 한다니, 사계절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흙이 아닌 바위 위에 억척같이 뿌리를 내린 식생들은 그 종류도 다양하다. 식나무'붓순나무'왕초피나무 등이 그것이다.

오름을 오를 때는 등산스틱은 두고 가야 한다. 비가 오더라도 우산을 쓸 수 없다. 등산 스틱이 자칫 나무뿌리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며 우산이 나뭇가지에 영향을 줄까봐서다. 오름을 오를 땐 숨이 가빠지더라도 나뭇가지를 잡는 것은 금물. 오롯이 나의 힘으로 올라야 한다. 그에 반해 육지의 산은 인간의 '편리'란 미명 하에 얼마나 혹사당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오름에 대한 보호는 한층 강화됐다. 오름은 아무 때나 오를 수 없다. 평일엔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탐방시간이 정해져있고, 미리 예약해야 한다. 매주 화요일에는 자연휴식의 날로 정해져, 탐방이 아예 불가능하다.

세계자연유산 해설사 조재영(61)씨는 제주의 매력에 푹 빠져, 5년 전 아예 제주도로 터전을 옮겼다. 대대로 서울 토박이였던 그는 2년 동안 배낭을 메고 제주 곳곳을 직접 걸어다니며 답사하고 공부했다. 지금은 거문오름과 제주국립박물관,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해설사로 자원봉사하고 있다. 웬만한 제주방언은 제주민처럼 구사할 줄 안다. "제주는 자연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에요. 한겨울, 한여름 할 것 없이 오름은 깊은 명상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눈이 쌓인 오름 분화구 한켠에 따뜻한 온기가 나오고 그곳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몽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지요."

제주의 특별 보너스는 오름의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 1970년대 인공조림한 삼나무가 울창하다. 상록활엽수림'낙엽활엽수림도 있다. 오름을 걷는 내내 머릿속까지 상쾌해지는 이유다.

하지만 오름은 슬픔의 땅이기도 하다. 고난과 비극의 제주 근현대사가 압축돼 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와 이어진 4'3사건의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든 갱도진지 등 군사시설은 오늘날까지 오름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다. 이들 갱도 진지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최후의 전쟁기지로 삼았던 생생한 역사현장이다. 이어 해방공간에 불어닥친 4'3사건 당시엔 제주 사람들의 도피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넓고 깊숙한 거문오름 일대는 사람들이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던 생활터전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영목장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일본군 진지동굴 안에는 양치식물들이 잘 자라고 있다.

오름을 오르며 28만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거문오름의 동식물

거문오름의 식생은 인공조림한 삼나무림, 낙엽활엽수림, 관목림 및 초지, 상록활엽수림 등 특징적인 4개의 숲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용암하도를 따라 다양한 함몰구가 발달, 독특한 생태적 입지를 지니고 있으며 난'온대 식물이 공존하는 식생과 식물상을 갖는 곳이다. 또 식물종 다양성이 높으며 특히 양치식물의 경우 지리적 입지가 비슷한 다른 지역에 비해 독특하다. 일색고사리'주름고사리'지느러미고사리'주걱일엽'쇠고사리'나도은조롱'가시딸기'붓순나무'식나무 등을 볼 수 있다.

직박구리'제주휘파람새'호랑지빠귀'큰오색딱따구리'어치와 같은 텃새와 팔색조'삼광조'흰눈썹황금새와 같은 철새의 번식지가 되기도 한다.

#숲길 탐방

평일엔 하루 100명, 주말과 휴일엔 200명으로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있어 미리 예약해야 한다. 일반 코스는 3시간거리의 5㎞. 평일엔 오전 9시, 10시, 11시 세 차례 인솔자와 함께 탐방이 가능하다. 주말과 휴일엔 오전에 5차례 출발하지만 예약이 밀려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거친 돌밭길이 많으므로 등산화를 신고 생수를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매주 화요일엔 탐방을 받지 않는다. 7월엔 5시간 트레킹 코스를 개방할 예정이다. 064)750-2514.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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