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근대화'라는 말이 마치 '서양 문화의 수용'과 같은 말인 것처럼 여겨지고 전통문화의 우수성이 퇴색되어가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중'고교나 대학교에서 법학에 관련되는 내용을 가르칠 때에도 서양 법학에 관해서는 각종 서양법이론과 법철학의 발달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의 법학에 관해서는 국사 교과서에서 고조선의 팔조금법의 내용을 언급한 이후에 경국대전, 대전회통 등 대표적인 법전의 이름만을 알려 주고 있을 뿐 당시의 백성들에게 적용되었던 법령의 내용이 실제로 어떠했는지 여부는 자세히 가르치지 않는다.
다음은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서 중의 하나인 정도로 알고 있는 '흠흠신서'의 서문 중 일부이다.
'하늘이 사람을 내고 또 죽이니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매여 있다. 사람이 天權(천권)을 대신 잡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자세히 헤아리지 아니하고 덮어두고 모른 체하며 살려야 할 사람을 죽이고,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고서도 마음 편히 있다. … 삼가고(欽) 삼가는(欽) 것이 형을 다스리는 근본이다.'
'흠흠신서'는 중국과 한국의 고전과 역사적 사실, 정약용 자신이 직접 처리한 재판 기록 등을 사례별로 정리한 다음 정약용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서술한 형사 판례 해설에 해당하는 책이다. 정약용은 '흠흠신서'에서 재판관은 형사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사건을 신중하게 다루고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원칙과 함께 융통성도 갖추어야 함을 강조했다. 나아가 재판을 하면서 사람의 겉모양만을 살피다 보면 선입견을 가지게 되어 일을 그르치게 되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 형사 사건을 잘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온화하여 백성을 다친 사람 대하듯 해야 형사 사건을 공평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하면서, 형사 사건을 처리하는 근본은 '정성'뿐이라고 했다. 정약용은 "생각하고 생각하면 귀신도 통하고, 정성이 감응하면 곧 귀신이 와서 고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정약용은 위 서문에서 재판권은 하늘로부터 받은 권한이라고 하였는데, '민심은 곧 천심'이니 이는 결국 민주주의를 표현하는 말이다. 재판을 함에 있어서 피고인을 불쌍히 여기고 정성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 무죄 추정 원칙을 나타낸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관하여 정약용은 "수를 위하여 삶을 구하고 죽임을 구하지 아니함은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으므로 살려 놓고 그 죽임을 구하더라도 늦지 않다. 죽여 놓고 삶을 구하면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형사 사건을 다루는 자는 반드시 죄수를 위하여 삶을 구하여야 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또 흠흠신서의 본문에서는 고의범과 과실범의 구별, 장애인과 부녀자'소년에 대한 형의 감경, 형사 재판의 신속 처리, 당시 수준에서의 형사 사건에 관한 각종 과학수사 기법 등 오늘날의 형사 사건에도 적용되고 있는 각종 법률과 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판사로서 15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서양법과 서양 법학자는 알면서 정약용이 훌륭한 법학자였다는 것과 그의 사상을 알지 못하였다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판사로 일한 지 15년쯤 지나고서야 겨우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판사는 재판을 받는 당사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 다음에야 비로소 사실 관계의 판단 및 법률 이론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지혜로운 재판의 예로 솔로몬 왕의 재판을 든다. 여기에서 지혜로움에서 더 나아가 사랑까지도 함께 갖춘 재판의 예를 흠흠신서에서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어느 날 집단 폭력 사건이 발생해 관아에 고소되었다. 한 사람은 피가 흘러 얼굴을 덮었고 뇌가 거의 깨졌다. 재판관은 이를 가엽게 여겨 약을 직접 만들어 성실한 관리들에게 맡기면서 "잘 간호하여 상처가 덧나는 일이 없게 하라. 이 사람이 죽는 것은 너희들의 책임이다"라며 그 피해자의 가족들이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고는 그 사건을 다시 심리하여 직접적인 가해자만 옥에 가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이 사례에 대해 정약용은 "목민관이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함으로써 구타당하여 거의 죽게 된 자를 관아에서 치료하여 생명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실로 큰 음덕이다. 둘이 죽느니보다는 둘 다 살게 하여 무사하게끔 하는 것만 하겠는가?"라는 해설을 덧붙였다.
이영숙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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