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경기 장내 아나운서 1호…고영선 체육교사

입력 2009-04-04 06:00:00

그녀는 화사했다. 봄 햇살에 더 빛났다. 옷이 밝았고, 표정도 밝았다. 가냘픈 몸매였다. 나이보다 여려보였다. 대구스타디움의 거대한 위용 앞에서 더 왜소했다. 경기장의 수많은 관중을 쥐락펴락하는 이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말투는 당찼고, 미소는 끊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외모를 무색하게 하는 강한 열정이 묻어났다.

지난 31일 대구스타디움에서 그녀를 만났다. 고영선(36)씨. 대구여고 체육교사다. 국내 체육계에서는 교사로보다는 육상경기대회 '장내 아나운서 1호'로 더 잘 알려졌다. 전국체전이나 육상대회를 수차례 다닌 육상 마니아들에겐 꽤 알려졌지만,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농구장이나 야구장에서는 장내 아나운서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육상경기장에선 경기를 진행하는 대회 관계자 외에 전문 장내 아나운서는 잘 없었다. 그녀가 유일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고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체육시간이 늘 즐거웠다. 기계체조부터 달리기 농구 배구 등에 관심이 많았고, 소질도 있었다. 교과 성적도 우수했다. 초교 2년 때부터 홀로 4남매를 키워온 어머니는 그녀의 체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못마땅해 했다. 고교시절엔 체육교사까지 그녀가 대학 '체육교육학과'에 들어가는 것을 말릴 정도였다. 어머니의 소원은 그녀가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체육이 아닌 다른 분야 교사였다. 체육교사인 그녀는 지금 어머니의 소원을 절반은 들어준 셈이다.

10년 전 팔달중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한 고씨는 2002년 '장내 아나운서'로 데뷔했다. 그해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전국소년체전. 조영호(대구 북동중 교사) 대구육상연맹 전무가 당시 '고 선생, 마이크 잡고 학생들 장내정리 좀 해 주지'라고 했다. 경기 참여선수들의 입장과 퇴장, 경기장 정리정돈 등을 요청했던 것. 고씨는 방송으로 장내 정리를 하던 중 짬이 나는 시간에 선수들에게 '경기장에서 지켜야 할 태도' '부정출발에 대한 규칙' 등을 설명했다. 고씨의 진행에 육상연맹 관계자들의 귀가 솔깃했다. 장내 아나운서 일은 이렇게 우연히 시작됐다.

이후 고씨는 2003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2004 부산국제육상경기대회, 2005~2008 대구국제육상경기대회, 2006~2008 전국체전 등에 줄곧 불려 다녔다. 고씨는 스포츠 장내 아나운서의 자질로 ▷관중, 선수와의 호흡 ▷선수에 대한 상세한 정보 ▷스포츠에 대한 전문지식 ▷깔끔한 목소리와 강약 조절 등을 꼽았다. 특히 관중과 함께 어우러지고, 선수의 특성과 이력을 순발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11년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육상경기대회 장내 아나운서 1호의 열정의 목소리를 들었다.

# 2006년 김천에서 열린 전국체전. 10월이었다. 다른 경기가 대다수 끝나고, 경기시간이 긴 장대높이뛰기만 남았을 무렵이었다. 대회 관계자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경기를 끝낸 선수와 감독들도 짐을 꾸렸다. 오후 7시쯤 날씨가 더 추워지자, 관중들도 하나 둘 발을 뗐다. 고씨는 가슴이 아팠다. 여자 장대높이뛰기 최윤희 선수가 새로운 기록에 도전 중이기 때문이었다. 최 선수는 중·고교를 거치면서 신기록을 계속 경신하는 촉망받는 선수였지만, 고교를 졸업한 뒤 받아주는 대학이 없는 상황이란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고씨는 목청을 높였다. 최 선수가 홀로 기록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외로운 싸움을 하는 최 선수를 혼자 도전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냐고 관중들에게 '한탄조'로 호소했다. 다른 쪽의 관중들이 장대높이뛰기 경기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최 선수는 이날 한국 기록을 깼다. 관중들은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고씨는 짜릿했다. 이후 원광대에 진학한 최 선수는 지금도 기록을 경신 중이다.

#또 다른 전국체전 경기장. 5일간 진행되는 이 체전에 고씨와 육상관계자 2명이 장내 방송을 맡았다. 그러나 첫날 관중과 육상 관계자들의 관심이 고씨에게 집중되자, 방송을 맡은 육상 관계자 2명은 슬그머니 부스를 빠져나갔다. 덕분에 고씨는 마지막 날까지 홀로 장내 아나운서를 맡았다. 목이 쉬었다. 마지막 날 시상식을 진행하던 고씨는 자신의 목소리가 자꾸 갈라지자, 급기야 크게 웃어버렸다. 자신의 목소리에 폭소를 터뜨리는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나 비난할 줄 알았던 관중들은 큰 박수와 '파이팅'이란 연호로 격려했다. 관중들도 5일 동안 고군분투한 고씨의 처지를 알았던 것. 터뜨렸던 웃음은 글썽이는 눈물로 바뀌었다. 가슴이 싸했다. 관중과 함께 호흡하는 장내 아나운서로서의 일에 보람을 느꼈다.

◆칭찬은 어른의 덕목

-체육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체육시간을 좋아했지만,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였습니다. 지금은 중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당시 체육선생님이 칭찬을 많이 해줬습니다. 물론 다른 친구들보다 소질은 좀 더 있었지만, 그분은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지요. 체육인이 된 결정적 계기입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부모든 교사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줘야 합니다. 기를 살려줘야지요. 때에 따라 따끔한 질책도 필요하겠지만. 청소년들의 인성과 자아발전을 위해 칭찬은 기성세대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봅니다."

◆관중과 함께 호흡하는 장내 아나운서

-장내 아나운서로서 만족합니까?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관중들에겐 자연스런 감동이 필요합니다. 적절한 시점에 선수 개개인에 대한 특성, 성장과정까지 곁들여 설명할 때 반응이 크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육상연맹 관계자나 감독 등을 통해 선수 개인의 이력과 특성을 귀찮을 정도로 묻습니다. 저한테는 소중한 정보입니다.

육상은 동시에 여러 경기가 진행되는 특성상 순발력 있는 진행이 필요합니다. 관중들은 출전선수의 면면이나 기록 면에서 어느 쪽의 어떤 경기가 관전 포인트인지 궁금해 합니다. 이 부분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육상 관련 국제룰이 자주 바뀌고 있지만, 제때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인터넷 영어강의를 듣고, 올해부터 영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바뀐 국제룰을 제대로 파악해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답답한 적이 있습니까.

"지난해 대구국제육상경기대회 때였습니다. 이전에는 경기장 본부석 부스에서 진행했는데, 작년에는 조직위의 요청에 따라 월드컵경기장 맨 위층 중앙통제실 안에서 진행했지요. 여기서는 선수들과 경기장면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요. 장내 아나운서는 경기장면과 선수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합니다. 현장의 날씨, 경기상황 등을 제대로 전달하고 관중과 함께 호흡해야 생동감이 넘치는데, 이 점이 아쉬웠습니다.

또 아나운서는 심판과 경기상황을 정확히 주고받아야 합니다. 선수교체, 진행순서 등을 심판 보조요원들로부터 수시로 전달받아야 관람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무전기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 때문에 장내 아나운서 부스와 경기장, 관중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야 합니다."

-어떨 때 보람을 느끼나요?

"관중들이 같이 호흡할 때입니다. 관중과 함께 무언의 박자가 맞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음료수나 떡을 주며 격려해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진행을 끝낸 뒤 동반촬영을 하거나 사인을 해줄 때 하루의 피로가 가십니다."

◆경쟁심 유발은 큰 선수로 성장하기 위한 자극제

-어떤 자세로 임하나요?

"선수들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경쟁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기록이 뛰어난 선수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면 기록이 부진한 선수들의 시기와 질투심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큰선수가 되기 위해선 이런 부분도 극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록이 우수한 선수들을 격려하고, 다른 선수들에게는 자극을 주기 위한 속셈이지요.

국내 스포츠 분야 가운데 특히 육상의 각종 기록이 세계기록에 비해 크게 뒤지는 점도 자주 언급합니다. 국내 육상이 성장하고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상황과 육상 환경에 대해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지요. 육상인프라 구축과 육상인재 양성에 대한 정부와 체육계의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합니다. 육상인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문화의 변화도 절실합니다."

-실수한 적은 없었나요?

"있었지요. 2005년 대구국제육상경기대회 때였어요. 110m 허들 경기에 앞서 선수를 소개할 때 명단에서 한국 선수 1명이 빠진 자료를 전달받지 못했어요. 선수들을 차례로 소개하는데, 중국 류시앙 선수가 입장할 때 원래 순서인 한국 선수 이름을 불렀다가 급하게 바꿨지요. 류시앙 선수의 얼굴을 익히 알고 영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하지만 조직위에서 이 부분에 대해 지적했을 때 속이 많이 상했어요. 이후 다른 대회의 진행을 하면서 더 꼼꼼하고 철저하게 대비를 할 수 있었지만…."

◆사람과 동물에 대한 애정

-학교생활은 어떻습니까.

"모범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요즘 고교엔 야구, 배구, 농구, 테니스를 비롯해 골프 수업시간까지 있기 때문에 교사도 다방면에서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초교 때부터 달리기는 늘 반 대표였습니다. 수영은 대학 때 강사를 해본 경험이 있고, 테니스는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골프 수업을 위해 6년 전부터 배우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교사로서 충실하면서 장내 아나운서도 더 잘하고 싶습니다. 욕심이 많지요.(하하)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앞으로 실천할 것입니다. 주변의 홀몸노인, 소년소녀가장 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습니다. 삶과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봅니다. 버려지거나 다친 동물에 대해서도 눈길이 갑니다. 차를 몰고 가다 다친 동물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관심으로 약 10년 전 한국동물보호협회에 가입했습니다. 앞으로 나만이 아닌 주변을 둘러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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