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 천사등록증

입력 2009-03-26 06:00:00

아들이 올해 발급받은 따끈따끈한 주민등록증을 자랑스럽게 내민다. 사진 옆에는 교회에서 단체로 서약한 '장기기증'이란 스티커가 보무도 당당하게 붙어있다. "친구들 사이에 녹색 스티커가 붙은 주민등록증은 '천사등록증'이고 신용카드로 치자면 '플래티늄'급 정도로 구별된다"며 생색을 낸다. 친한 친구 몇 명은 그 등록증이 부러워 자신들도 장기 기증 서약을 했다며 전염력이 있는 '천사등록증'이라고 뻐긴다. 며칠 전에는 학교에 헌혈차가 와서 친구들이랑 빵과 우유 받아먹고 싶어 헌혈도 했노라고 넉살스런 표정이다.

성적이 내 욕심에 차지 않아 늘 2% 부족해 보이던 녀석이 오늘은 왠지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보인다. 입시 부담 때문에 관심의 시야가 제한적이고 사고의 반경이 협소한 줄만 알았던 철부지 고등학생들이 이런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김수환 추기경이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란 선문을 남기며 얼마 전 선종하셨다. 추기경님이 남기신 선물 중 하나가 "나도 장기 기증" 열풍인 것 같다.

바로 나를 희생해 남을 구하자는 구도의 정신인 것이다. 김 추기경님이 각막을 기증하셨다는 소식에 많은 시민들이 위대한 영적 지도자이자 이 나라의 큰 어른이신, 그분으로부터 거룩한 영향을 받아 장기 기증을 결단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으며 얼마 전 사망한 우석이를 떠 올려 본다.

우석이 부모님은 맞벌이 교사이자 교회 교우였는데 우석이가 아토피 피부염으로 꾸준히 내게 진료를 받았다. 얼마 전부터 "사시가 생겼다. 좋은 안과 병원을 소개 해달라"고 부탁하더니 뇌종양으로 진단받고 대학병원으로 옮겨 수술 받고서는 뇌사 상태에 빠졌다. 이 슬프고 불행했던 사건이 너무나 급작스러워 마치 동영상 필름을 보는 듯했다. 아홉 살 우석이는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현명하고 지혜롭고 사랑이 많은 그의 부모님들은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다. 뇌사상태의 우석의 장기 중 신장을 비롯해 간, 각막을 5명의 다른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거듭나게 하였다. 죽은 우석이는 쓸쓸하게 홀로 죽은 게 아니라 더 많은 생명으로 화려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시험관 아기로 어렵게 얻은 우석이와의 아쉽고도 짧은 이 세상에서의 만남과 성급한 이별을 주체할 수 없는 부모는 학교를 휴직하고 외국 봉사 활동을 떠났다고 한다.

며칠 전 병원을 찾은 그들은 아프리카 오지를 지원, 우물 파는 사업에 동참하고 왔는데 우물 이름을 모두 '우석 우물'로 지었다고 웃으며 근황을 담담히 전한다. 큰 슬픔을 겪은 그들이 결코 슬퍼 보이지 않는 이유가 뭘까? 죽은 우석이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이유는 뭘까?

그들이 떠나고 난 진료실에 앉아 나의 주민등록증도 슬며시 꺼내 본다. 스티커가 얌전히 붙어 있다. 추기경님처럼, 우석이처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나의 장기도 사랑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해본다. 열어 놓은 창틈으로 향기와 빛이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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