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사람] 흥생한의원 조경제 원장

입력 2009-03-23 06:00:00

대구시 서구 감삼동 193번지. 이곳에는 70여년 전 지은 옛집(혜산 고택: 慧山은 조경제 원장의 호)과 1974년에 지은 새집이 있다. '성서 조(趙)약국'으로 잘 알려진 흥생(興生) 한의원 조경제 원장과 장남 강래(푸른방송 대표이사)씨 가족이 사는 집이다. 연극, 영화, 뮤지컬이 예술적 감동을 준다면 이 집과 이 집 사람들은 생활의 감동을 준다.

조경제씨는 30여호 되는 감삼동 부락에서 토굴 같은 초가삼간에 살았다. 70여년 전 마을 부잣집 문간방 허는 데서 얻어온 재목으로 한겨울에 지금 혜산 고택이라 부르는 집을 지었다. 1974년 지은 새 집도 30년이 지나 이제는 '옛집'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낡았다.

새 집 한쪽에는 작은 박물관(혜산관)이 있다. 조경제씨가 젊은 시절 농사지을 때 쓰던 물건부터 지금까지 써온 물건을 모두 전시해 놓았다. 나락과 찌꺼기를 구분하는 데 쓰는 풍구, 탈곡기, 가마니틀, 베틀, 풍로, 짚신, 똥장군, 멍에, 옛날 비누, 부채, 풍금, 야간 통행증, 신분증, 각종 행사 참가 명찰, 옛 화폐, 옛 전화기 등 수천 점이 넘는다. 일제 강점기 조경제씨가 타고 다녔던 자전거에는 '자전차 감찰 315 경북달성'이라는 번호판이 붙어 있다. 일본 후지 자전거 회사 제품이다. 해방되던 날 기쁨에 들떠 서문시장 노점에서 샀던 옛 벼루도 있다. 오래된 축음기와 라디오도 많다. 초기 에디슨식 축음기는 태엽을 감아 쓰는 기기로 LP판이 아니라 원통형 레코드에 노래가 녹음돼 있다.

조경제씨는 쓰던 물건을 버리지 않았고 몇 가지 물품은 수집도 했다. 축음기를 특히 많이 수집했던 것은 아버지 조국현씨를 생각해서다. 한약재를 팔아 생계를 꾸렸던 아버지는 손님을 끌기 위해 축음기를 틀었다. 그렇게 돈을 벌어 자식을 먹이고 입혔던 것이다. 조경제씨에게 축음기 수집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다.

조경제씨는 지금까지 어떤 물건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들도 물건을 버릴 수 없다. 신세대 손자들이 낡은 휴대폰을 버렸다가 혼나기도 했다. 이 집 박물관에 있는 물건들은 그렇게 모은 것들이다. 비싼 물건은 없다. 그렇다고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세월과 인생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조경제씨는 30대 시절부터 88세인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고 있다. 1990년까지 쓴 일기는 '내 고향 감삼골 1·2'로 정리해 책으로 냈고, 1991년부터 2008년까지 쓴 일기는 '홍안'(紅顔·회고록)으로 정리해 최근 출간했다.

그는 왜 물건을 버리지 않고, 매일 일기를 쓰는 걸까. 악필 교정을 위해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 처음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관찰자의 눈에 그의 일기와 옛 물건은 생활기록부처럼 보였다.

오늘 내가 썼던 물건, 오늘 내가 뱉었던 말은 결국 나를 증언하는 증거물이다. 물건을 버리지 않는 행위, 일기장에 고백하는 행위는 결국 자신을 단속하기 위함이 아닐까? 일거수일투족이 기록으로 남는데 어떻게 해이해질 수 있을 것인가? 설령 아무도 일기를 훔쳐볼 수 없고, 누구도 자기 집에 보관한 물건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만큼은 따가운 눈으로 보아야 하니 말이다.

조경제씨의 생활은 엄격함 그 자체다.

오전 4시에 일어나 1시간 동안 기체조를 한다. (예전엔 등산을 다녀왔다고 한다.) 매일 아침 집안에 마련해 둔 아버지 어머니 사당에 들러 향 피우고 절 올린다. 오전 6시 20분에 아침을 먹고, 낮 12시에 점심, 오후 5시 30분에 저녁을 먹는다. 오후 8시면 잠자리에 든다. 술은 저녁에 반주로 딱 한잔만 마신다. 소주든 정종이든 양주든 있는 술을 마신다. 그리고 매일 저녁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일기를 쓴다. 50여년 어긴 적 없는 생활규칙이다.

본인 몰래 장남 강래씨와 함께 그의 방엘 들어가 봤다.

어두컴컴하고 냉기 도는 방, 구들장 한쪽이 살짝 내려앉은 방이었다. 방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없었다. 10년은 훨씬 지났을 낡은 텔레비전, 앉은뱅이 책상과 라디오, 컴퓨터와 한쪽에 깔아둔 요가 전부였다. 벽에는 그럴듯한 그림 한 점 없었다. 오래돼 누런 벽지에는 아들과 손자들 사진이 가득 붙어 있었다.

이 부잣집 어른은 겨울에도 하루에 1시간만 보일러를 돌린다. 기온이 엄청나게 떨어지는 날엔 아침에 1시간, 저녁에 1시간 보일러를 돌린다. 그래서 이 집 식구들은 집에서도 두툼한 옷을 입고 지낸다. 코 푼 종이를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좀 마르면 다시 코를 푼다. 그렇게 코를 풀고 말리고, 사나흘 쓴 후에야 버린다.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다시 필터가 탈 때까지 피운다. 옷과 신발은 해질 때까지 신는다. 오래 전 장남 강래씨는 방에 들어온 바퀴벌레를 잡으려고 티슈 한 장을 썼다가 혼쭐나기도 했다.

아버지의 엄격한 가르침에 따라 자식들도 엄격하다. 맏아들 강래씨는 쉰이 넘은 나이에도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큰 회사의 대표이사이지만 골프도 치지 않는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고 허름한 승합차를 타고 다닌다. 조경제씨는 그렇게 아껴 번 돈을 대체 어디에 쓰는 것일까.

"돈이 있으면 나갈 구멍을 만들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집니다."

조경제씨는 자식 8남매가 다닌 국민학교(초등학교)와 대학의 이사를 맡아 학교 발전에 힘썼다.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입원시켜 치료했고, 불우한 아이들의 학비를 아낌없이 대주었고, 본리초등학교에 우물을 파고 탁구장, 교문,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들었고 땅을 희사해 진입로를 확장했다. 회갑 생일잔치 대신 동네 노인들을 위해 대구 최대 규모의 경로당(서구 감삼동 137의 3번지에 세운 '수림원')을 지었다.

30여년 전 장학회를 설립해 성서면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매달 1일과 국경일에는 음식을 장만해 70∼90세 노인들을 위한 위안잔치를 연다. 매년 어버이날에는 마을의 효자와 효부를 찾아 표창한다. 그가 지금까지 받은 감사패와 표창장은 대체 몇 장인지 헤아리기도 버겁다.

그는 주머니를 털어 남을 도우면서도 나서지 않았다. 장학회를 설립해 수억원을 내놓았지만 그 자신은 이사도 이사장도 아니다. 이 장학회는 마을 주민들이 끌어갈 뿐 그는 관여하지 않는다. 개인이나 단체를 도와줘도 자기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 이름으로 돈을 내놓았다. 자식들조차 아버지의 선행을 다 알지 못한다.

조경제씨는 보약 짓지 않는 한의사다. 본래 보약은 영양이 부족해 허약한 사람을 보하는 것이다. 요즘은 영양이 넘치니 보약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처방하는 약은 오직 '소화'를 돕는 약뿐이다. 그의 집과 생활 방식은 우리가 곱씹어볼 만한 '생활문화'였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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