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은 알고 있다. 지난 5년간 대구에서 매주 찾아오는 한 객(客)이 있다는 것을. 지리산은 진정 자신을 알아주고 함께 호흡하려는 이 객이 고맙다. 누군가를 데려오지도 않는다. 혼자 온다. 이번엔 이 산줄기, 다음번엔 저 산줄기를 오롯이 감상하고 돌아가는 이 객이 그저 반가울 뿐이다. 자신의 자취를 남겨두지도 또 산에 있는 무언가를 가져가지도 않는다. 그저 순수하게 산을 좋아할 뿐.
지리산이 이렇듯 인정하는 이 객은 바로 대구 대륜중 서영목(54) 교감이다. 지리산은 아마 서 교감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정 날 알고 싶어 찾아오는 손님이니 내 구석구석 숨겨뒀던 좋은 곳을 알려주고 싶은 이요. 1년에 수십번이 아니라 수백번을 찾아와도 반겨줄 이다."
서 교감도 지리산에 화답한다. "이 산은 나와 기운이 맞고 편안해 하루종일 걸어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은 이쪽 능선을 타고 돌아오면 내일은 저쪽 능선을 타고 싶습니다. 다양한 테마산행도 가능하고요."
산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둘은 알고 있는 것 같다. 독립영화로 영화관객 200만명 이상 관람 기록을 세운 '워낭소리'의 주인공인 할아버지와 늙은 소의 관계라고나 할까. 서로를 배려하고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동지와 다름없다.
'지리산 산신령'이라는 별명을 얻은 서 교감을 만나 '왜 지리산이 그리도 좋은지' 물었다. 답은 '그냥 좋아서'지만 그 속에는 산을 타는 철학이 숨어 있었다.
◆우연히 찾았다 지리산 마니아가 되다
-왜 지리산입니까.
"5년 전 친구들과 함께 갔는데 이상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이 산이 나와 딱 맞는 산이구나'라고 느꼈고 점점 더 빠져들게 됐습니다. 그 전에는 주로 대구 인근 팔공산이나 앞산 등을 다녔는데 한번도 지리산과 같은 기운을 느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매주 주말이면 도시락을 싸서 지리산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는데, 도무지 끝이 없습니다. 더 빠져들고 갈 때마다 설렘니다. 지리산과 이미 하나가 된 듯합니다."
-얼마나 자주 찾습니까.
"월~금요일은 학교일에 매여 등산을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주말에 무조건 지리산으로 갑니다. 주로 새벽 일찍 출발해 당일코스로 가지만 어떨 땐 1박 2일 코스로 가기도 합니다. 5년 동안 족히 200차례 이상은 오른 것 같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날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 지리산으로 떠납니다. 그렇게 다녀도 산이 방대해 아직도 안 가본 곳이 많아요."
-가족들에게 미안하지 않은지.
"같은 교육계에 일하는 아내가 더 바쁜데 미안하죠. 하지만 아이들이 이미 다 컸기 때문에 덜합니다. 제가 주말에 집에 있는 것보다 산에 갔다오는 게 더 큰 삶의 충전이 되는데 어쩌겠어요. 그래서 가족들도 다 이해하죠. '지리산이 주말마다 우리 남편,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이 때문에 아내는 마음 편히 다녀오라고 산에 가기 전날 먹을 것을 미리 챙겨줍니다."
◆산에서 삶의 철학을 배운다
-산에서 인생을 배웁니까.
"산은 정말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다들 정상에 오르려 하지요. 하지만 정상은 오래 머물도록 허락지 않는 곳이지요. 춥고 외로운 자리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어요. 권력, 돈을 쫓아가는 우리의 인생과 비슷하지 않은가요. 동·식물, 지리, 기후, 역사 등 모든 학문도 산 속에 들어있지요. 특히 지리산은 크고 넓어 그런 가르침을 더 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가 서려 있는데.
"지리산엔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겨 있어요. 신라시대에는 화랑도들도 이 산에서 수련을 했고, 조선시대 말에는 동학군의 피란처가 되었지요. 6·25전쟁 때도 주민들의 피신처이자, 빨치산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지요.
해발 1,500m에 이르는 지역인 세석평전에 올라보십시오. 철쭉철에는 지상의 화원이 펼쳐진 듯하죠. 이 산이 얼마나 웅대하고 깊은 역사를 품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지리산은 경남, 전남, 전북 이렇게 3도에 걸쳐 있잖아요."
-지리산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지.
"지금 박사과정 논문을 쓰고 있어 너무 바쁜데, 이 일이 끝나고 나면 그동안 혼자만 감상하고 즐겼던 지리산을 모두와 함께 나눌 수 있는 기록물을 출간하고 싶습니다. 그저 산만 좋았을 뿐 구체적인 기록은 하지 안았지만, 오히려 머릿속에 너무 생생하게 남아있고 몸에 체화된 등산길이었기 때문에 기억을 살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디지털 카메라에 새겨진 날짜 표시도 있잖아요."
◆죽을 뻔하다
-등산하면서 사고는 없었습니까.
"딱 한번 큰 사고가 있었는데 정말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백무동으로 올라가는 한신계곡에서 칠성봉까지 계곡을 타고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해발 1,000m에 위치한 폭포 인근 너럭바위에서 잠시 잠을 잔 뒤 다시 산행을 시작해려 했는데 발을 잘못 디뎌 폭포 7, 8m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 짧은 순간 '아 사람이 이렇게 해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들, 친구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하지만 지리산이 이 객을 살리려 했는지 나뭇가지를 잡았는데 머리가 아닌 다리부터 폭포수 아래로 정확히 떨어졌습니다. 다행이었죠. 이마 왼쪽이 조금 찢어지는 부상만 입었을 뿐 크게 다친 데는 없었습니다."
-사고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리산이 저에게 큰 교훈을 준 것 같습니다. 이후 무리한 코스로는 산행을 하지 않으며 혹시라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이내 방향을 돌리거나 산을 내려옵니다. 한 2, 3년 지리산이 한창 좋아 무작정 다닐 때였는데, 산이 아무래도 경고를 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에겐 걱정할까봐 자세한 얘기조차 할 수 없었어요. 혹시라도 아내가 지리산에 가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 갈 때마다 걱정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리산과 하나되다
-가끔 산짐승을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까.
"멧돼지를 가끔 만나지만 멧돼지들이 먼저 달아나요. 순간적으로 움찔 해도 멧돼지들이 사람을 해치려 하지 않는다는 걸 이내 알게 됩니다. 봄철에는 멧돼지들이 새끼를 데리고 다닐 때가 있는데 이때는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가끔 만나는 고라니, 청설모와 독사까지 이미 친구가 됐습니다. 산행에 볼거리를 제공하는 즐거움이자 지리산이 데리고 있는 식구들이라 생각하니 그저 보면 반가울 뿐입니다. 특히 봄철 '노고단 원추리' '바래봉 철쭉' 등 야생화들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예쁜 친구들이지요."
-왜 혼자서 다니나.
"진정한 산의 묘미를 만끽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 합니다. 오전 2, 3시에 등반을 시작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운해(雲海)를 보거나 일출 또는 일몰을 맞이할 때는 그 희열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산에서 여럿이 올라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혼자 사색하거나 여기저기 오묘한 아름다움을 살피며 올라가는 재미를 누릴 수가 없지요. 지리산의 정기를 몸에 담고 오려면 혼자 가는 게 좋아요."
◆지리산을 소개하다
-다녀본 곳 중 소개할 만한 코스가 있다면.
"정식코스가 아닌 곳으로 많이 다녀 소개를 해도 잘 모를 곳이 많습니다. 굳이 몇 군데 추천하자면 천왕봉을 오르는 코스로 백무동에서 하동바위를 지나 장터목에서 천왕봉을 오르고 다시 하산하는 하루 코스도 10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중산리에서 백무동을 지난 한신계곡의 아름다운 폭포를 구경하면서 세석평전, 능신봉, 촛대봉으로 올라갔다 오는 코스도 추천할 만합니다. 아니면 달궁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에 성삼재에서 출발해 노도단을 지나 천왕봉까지 오르는 코스도 괜찮아요. 지리산 중북부 능선에 위치한 7개 암자 코스도 매력있습니다. 실상사부터 시작해 도솔암에 이르면서 여러 암자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새벽에 일찍 출발해 아침에 도솔암에 도착하면 이곳에서 수도하고 있는 스님과 차 한잔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도 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지리산을 찾을 예정인가.
"기력이 다할 때까지 지리산을 갈 것 같습니다. 5년 동안 육체적·정신적 건강도 부쩍 좋아진 것 같고요. 학교에서 겪는 갖가지 일들을 지리산에선 다 잊어요. 맑아진 머리로 다시 업무에 임하니까 스트레스도 덜 하고요. 아직 절반 정도도 제대로 감상을 못한 것 같아서 환갑, 70세가 지나서도 못 가본 곳을 중심으로 다닐 생각입니다. 하지만 너무 지리산만 고집하진 않을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국내 다른 유명산에도 가보고 해외에도 가야죠. 단지 지리산처럼 가까운 친구는 다시는 없겠죠."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서영목 교감은?=1955년생. 안동교육대 졸. 한양대 교육학과 편입. 고려대 교육행정대학원 졸업. 계명대 교육행정 박사과정. 장곡초교, 안동초교, 양목초교 교사를 거쳐 1983년부터 26년째 대륜중학교에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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