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마하러 가면 안 돼요?"
아직은 불쑥불쑥 북한 억양이 튀어나오는 어눌한 말투로 새터민 김영숙(가명·27·여)씨가 이날 하루 보호자를 자청한 이경옥(66·여)씨를 졸라댔다. 북한과 중국에 각각 7세와 3세의 아이를 둔 '아줌마'였지만 김씨의 마음은 아직도 20대 소녀였다. 김씨는 맨 먼저 "머리 모양을 바꾸고 싶다"고 연방 졸랐지만 이씨는 난처한 얼굴빛이었다. 전날 있었던 자원봉사자 사전교육에서 "볶음머리(파마)를 하는 것은 안 된다"며 단단히 교육을 받았기 때문. 결국 이들은 머리 길이를 약간 다듬는 선에서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새터민, 신나는 나들이=천주교 대구대교구 민족화해후원회가 주최한 새터민 가정숙박체험에 나선 69명의 여성 새터민들은 처음 자유롭게 둘러보는 남한의 모습에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민족화해후원회가 하나원에서 남한 정착 교육을 받고 있는 새터민들을 초청한 것은 2002년부터 벌써 네번째다. 대구에 도착한 새터민들은 12일 낮 12시 중구 남산동 대구대교구청 대강당에서 하룻밤 대구 체험을 함께할 자원봉사자들과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각자 '자본주의 체험'에 나섰다.
새터민 김영숙씨와 박영애(가명·40)씨, 그리고 이정희(가명·44)씨가 맨 먼저 찾은 곳은 서문시장 동산상가. 오는 26일 하나원을 퇴소해 각자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봄에 입을 만한 옷 한벌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화려한 봄옷에서 눈을 떼지 못했지만 결국 사이즈가 넉넉한 레깅스(쫄바지)와 허리 고무줄이 들어간 편안한 원피스 한 벌을 택했다. 한국행을 결심하고 태국의 수용소까지 간 후에야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됐다는 박씨는 벌써 임신 7개월이었다.
아직은 멋 내는 데 한창 관심이 많은 20대 후반의 김씨는 아예 물 만난 고기였다. 북한을 탈출해 벌써 중국에서 3년 이상을 지낸 경험이 있다 보니 김씨에게 자본주의는 더 이상 특별한 세상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좁은 시장골목을 누비며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검은색 바지, 한창 유행하는 허벅지를 덮는 긴 남방에 꽃무늬가 프린트된 스카프까지 장만했다. 가게 주인들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깎아주세요"라고 조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물건값을 깎느냐"는 질문에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면서 "제값 다 주면 바보디요. 북한에도 종류가 많질 않아 그렇지, 시장에 가면 물건 사고 팔고 흥정도 합네다"고 응수했다.
◆생사의 고비를 넘어 도달한 한국땅, 아직은 낯선 곳=하지만 새터민에게 외래어는 너무나 낯선 말이었다. "내의 하나 사야 합네다"라는 말에 자원봉사자들은 이씨를 속옷가게로 데려갔지만 그는 고개만 저었다. 이씨가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티셔츠'였다. 이씨는 "외래어는 몇 번을 들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며 "남한 적응에 가장 힘든 문제는 너무 많은 외래어"라고 했다. 이들은 각자 재래시장과 백화점, 대형소매점 등을 통해 남한 사회의 변화상을 체험한 뒤 각자 하룻밤을 묵기로 한 자원봉사자들의 집으로 향했다.
자원봉사자 고복희(47)씨와 짝을 이룬 이씨가 묵을 곳은 달서구 상인동의 한 아파트. 133㎡(40평)가 넘는 집에 들어선 이씨는 놀라움과 부러움의 탄성을 내질렀다. "중국에서도 아파트는 봤지만 조잡합네다. 남한의 집들은 고급스럽디요."
정신없이 시장을 돌아다니느라 이름과 나이 외에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던 이들은 이제서야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씨는 2000년 남편과 이혼하면서 아들의 교육비를 벌기 위해 택한 중국행(탈북)이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 신세라 늘 도망 다녀야 했고, 돈 버는 일은 더욱 쉽지 않아 힘든 중국생활이었다. 이씨는 "이렇게 말도 통하지 않고 낯선 땅에서 사느니 내 나라 사람들과 남은 세월을 살아가겠다는 생각에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했다.
한국행은 멀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브로커에게 수백만원의 돈을 주고 무려 12일간 중국과 미얀마, 라오스를 거쳐 태국 수용소에 도착했다. 악어가 우글거리는 강을 뗏목 하나에 의지해 건너야 했던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자원봉사자 고씨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고씨는 이씨의 손을 꼭 잡고 "광주에 정착하겠다고 했지만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하라"며 "세상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언제든지 응원군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이들의 짧은 만남의 밤은 깊어갔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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