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대경인] 美의류업체 'Active USA' 이돈 대표

입력 2009-03-13 06:00:00

미국 LA 중심가 인근에 위치한 의류업체 'Active U.S.A.' 물류 창고는 거대했다. 1만1천㎡의 대지에 7천432㎡ 건평의 4층 높이 건물이다. 흡사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나오는 비밀 보관소처럼 상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물류창고는 초대 영남대 미주총연합회 동창회장을 지낸 이돈(54) 회장의 미국 이민 성공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그는 의류업체 'Active U.S.A.'의 대표이며 연간 1천만달러 이상의 경영 실적을 올리며 수천억원대의 자산을 가진 성공한 경영인이다. 빈손으로 미국에 와서 성실 하나로 일궈낸 성공이다.

그는 영남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73학번으로 군 복무(수도경비사령부)를 마치고 1980년 졸업했다. 삼환기업에 입사해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사 도시 앨버틴에서 25개월을 근무하고 귀국 후 코오롱건설에 근무하던 중 1986년 2월 미국으로 건너왔다.

낯선 땅 미국에서 그는 전공과 달리 낯선 의류사업에 뛰어들어 1988년 'Active U.S.A.'를 창립했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 수입해서 북미 전역의 백화점과 중남미로 수출하는 의류업체이다. 좋은 제품을 싼 가격에 낸다는 그의 전략은 미국 의류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사람 사는 일이 쉽지는 않더군요. 하필 그때 미국 흑인 폭동이 일어난 겁니다." 1992년 4월 29일 폭동으로 1991년 매입한 건물과 모든 물품들이 방화와 약탈을 당했다. 수년간 모은 재산이 허무하게 전소됐다.

"그때 CBS TV로 제 회사가 불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담했죠." 당시 그가 입은 피해는 200만달러. 폭동 최고의 피해액이었다. '불난 곳에 불같이 핀다'고 했던가.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의 재기에는 그가 그동안 닦은 신용과 성실이 큰 바탕이 되었다. 성실한 납세는 보험으로 되돌아왔다. "저는 번만큼 정직하게 세금을 냈습니다. 이것이 위기 극복의 큰 힘이 되었죠." 미국 정부는 그에게 50만달러를 장기 저리로 빌려주었다. 이 금액은 당시 융자 금액 중 최고액이었다. 성실한 납세에 대한 보답이었다.

또 하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거래였다. 수백만달러의 거래에 미수금은 피할 수 없는 일. 폭동으로 무너진 그를 안타깝게 여긴 이들이 앞다퉈 미수금을 챙겨주었다. 이를 발판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지난 2007년 지금의 최신식 물류 창고를 세웠다. 건축학과를 졸업한 그가 직접 설계한 건물이다.

그는 현재 LA의 새한은행 이사로 최대 주주이다. 지난해 1930년대의 공황에 버금가는 미국의 금융위기 속에서도 1천500만달러의 증자에 성공했다. 그러나 나스닥 진출 계획은 무산됐다. 2011년 나스닥 상장을 계획하고 있으며, 새로 출범한 오바마 정권의 금융 정책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는 영남대 동문 중 미주지역 최대의 재력가이다. 2002년 10월 영남대 미주총련(미주총연합동창회)이 창립되면서 초대 회장을 지냈다. 미주총련이 창립된 것은 전국에서 4번째였고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였다. 당시 총동창회장이었던 이의근 전 경북도지사, 당시 이상천 총장, 노희찬 대구상공회의소 회장, 전재희·임인배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 뉴욕과 LA, 시카고, 애틀란타, 샌프란시스코, 토론토, 밴쿠버 등 북미 7개 도시에서 200여명의 동문이 자리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시카고 토론토 뉴욕에서 총회가 열렸으며, 2010년에는 LA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그는 2006년 자랑스런 영대인상을 수상했으며 매일경제신문의 '미국 이민 100년사의 성공한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모교 사랑은 남다르다. 지난 2003년 미주 8개 지역 동문회장이 참여하는 장학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5만달러의 장학기금을 조성해 영남대 출신 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으며, 요즘도 해마다 모교를 방문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이민 2세대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이민 역사가 길어지면서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그는 조선 중종 때 문신인 이언적의 16세 종손이다. 그래서 한국 전통예절에 대한 관심도 각별하다.

그에 대한 LA 이민 한인들의 기대는 큰 편이다. 자칫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는 이민자들을 한데 묶는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그의 지인 중 한 사람은 "그는 남자가 돈 벌어 뭐하노!"라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다.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불 같은 성격에 일을 시작하면 끝장을 본다"고도 했다. 그는 먼 이국 땅에서도 경상도 사나이의 진면목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LA에서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