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2세 구준표와 서민 금잔디의 판타지 로맨스
고백하자면, '애도 아니고 뭐 그런 걸 보냐'고 했더랬다. "순정만화, 뻔한 거 아냐? 평범한 캔디를 잘생긴 테리우스, 안소니가 다들 좋아한다는, 뻔한 스토리겠지."
맞는 말이다. 드라마 KBS 2TV '꽃보다 남자'(이하 꽃남)의 스토리는 뻔하다. '순정만화의 바이블'로 불리며 일본에서 5천800만부가 팔린 것을 비롯해 미국'프랑스'스페인 등 전 세계 14개국에서 출판된 이 만화는 이미 대만과 일본에서는 '시즌2'까지 인기리에 방영된 바 있다. 그러니 애초에 스토리의 새로움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었다.
평범한 서민 집안의 한 소녀가 재벌 자제들이 가득한 특목고에 진학, 최고 재력을 갖춘데다 꽃미남인 F4와 우정과 사랑을 나눈다니, 신데렐라의 또 다른 변주 아닌가. 이보다 더 통속적일 수 있을까.
하지만 뒤늦게 꽃남의 한 회를 보고는 F4의 마력에 빠져들어 버렸다. 아뿔싸, 그동안 내가 우습게 여겼던 주변의 꽃남 열혈팬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어둡고 칙칙한 현실에서 만난 F4의 마력은 진정 달콤하고 화려하다. 재벌 2세이자 F4의 리더로 안하무인 제멋대로이면서도 사랑 앞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순정파 구준표(이민호), 조용한 듯 무신경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잔디를 돕는 로맨틱한 윤지후(김현중), 빼어난 외모와 예술가적 감성으로 여성들을 유혹하는 데 실력을 발휘하는 플레이보이 소이정(김범), 부동산 재벌이자 폭력조직의 후계자인 송우빈(김준)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니고 장난기 다분하면서도 배려 깊은 성격으로 등장한다.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F4가 아닌가. 이 F4는 의리도 있어 서울에서, 마카오에서 금잔디를 물적'심적으로 늘 도와준다. 금잔디가 상처받지 않도록 사방에서 꽃미남들이 사려깊게 도와주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흐뭇해진다.
덕분에 F4 열풍이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다. 학교 문구점에는 F4의 총천연색 사진들을 판매하고, 초등학생들까지도 지갑에 F4의 사진을 넣어다닌다. 특히 잘생긴 외모, 많은 돈, 우수에 찬 눈동자에다 순정까지 지닌 구준표는 10대 초등학생부터 아줌마, 할머니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구준표의 대사 '꺼져'는 장안의 화제가 됐고, 구준표 역의 이민호가 모델로 등장한 모 의류업체 제품은 30~40% 매출신장으로 이어졌단다. 덕분에 이민호는 단번에 CF 스타로 등극했다.
F4는 대한민국 '언니'들의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을 두루 갖췄다. F4는 '커피프린스 1호점'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쌍화점'처럼 꽃미남들이 나왔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꽃미남들에 열광하는 '언니'들이 10, 20대에서 40, 50대까지 그 외연을 넓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노골적인 빈부격차, 외모 지상주의, 재벌 우상화라는 비판에다 연기력 논란까지 빚어졌지만 10대 꽃미남들에게 60대 할머니들까지 목을 매고 있는 이유는 뭘까. 실제로 여자목욕탕에서 들은 아주머니들의 대화를 옮겨본다. "구준표 정말 멋있지 않나? 딸내미하고 같이 보는데 월, 화는 꽃남 때문에 바이오리듬이 수직상승하고 그 이후엔 꽝이야. 재방송을 해주는 주말은 그나마 낫지." "그래, 맞다! 어찌나 화려하던지, 그거 구경하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 아이가. 매번 최고급 호텔에다 최고급 명품, 화려한 색깔 외제차, 최고급 옷들 구경하는데 내껀 아니지만 눈이 시원~하다." 이 드라마를 통해 우리와는 다른, 최상류계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꽃남'이 끝나면 신데렐라의 마법이 끝나듯 초라한 현실로 되돌아온다. 내 옆에는 구준표처럼 돈많은 애인도 없고, 한나절 놀아줬다고 명품백을 선물하는 친구는 더더욱 없다.
불황의 그늘이 짙어갈수록 이처럼 판타지는 강렬해진다. 잠시나마 현실을 잊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다음에는 또 어떤 강력한 판타지가 등장할 것인가.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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