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대경인](13)美 산타아나 치과기공소 하덕민 대표

입력 2009-03-09 06:00:00

'입속의 예술'치기공 年 360만$ 매출

미국에서 치기공으로 성공한 하덕민(53) 씨를 만나기 위해 LA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산타아나를 찾았다. 깨끗한 단층 건물들이 줄지어선 펜들턴 거리에 'Mr. Crown Dental Studio'가 있다. 하 씨가 대표로 있는 치과기공소이다.

"시장 규모가 한국과는 비교가 안되죠. 10년간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대구보건대 치기공과 12회 졸업생이다. 82학번. 일찍 치기공에서 일을 했지만, 진학은 늦어 27살에 대학에 들어갔다. 84년 졸업해 직접 기공소를 운영했다.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했죠. 신기술을 먼저 도입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때가 1992년이다. 신기술의 자율경쟁 체제인 미국 시장은 그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여기서 뭔가 성공 가능성을 엿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견학만 하려고 했으나, 결국 눌러 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인들은 미국인과 달리 손재주가 뛰어나다. 치기공은 손재주와 눈썰미가 관건. 이미 한국에서 실전의 경험을 거친 그의 솜씨는 단연 돋보였다. 미국에서 치기공으로 이름난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의 글라이더웰 치과기공소의 트레이닝 매니저로 스카우트됐다.

"인터뷰를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보라고 했습니다. 테스트해보더니 흔쾌히 근무하자고 하더군요."

이때 일본과 독일 등 유럽 지역도 견학을 다녔다. 열심히 근무한 덕에 1년 만에 회사가 후원자로 나서고 영주권을 따냈다. 주5일 근무에 1천 달러의 주급은 괜찮은 수입이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기술과 경영 마인드를 얻게 된 것이 컸죠."

5년 계약으로 6년 반을 근무하고 98년 개업했다. "처음에는 고전했습니다. 낯선 동양인에게 의사들이 섣불리 작품을 맡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경상도 사투리에 서툰 영어로 전화 주문을 받는 것이 쉽지 않았다.

브로셔를 만들어 미국 전역에 보냈다. 한 주에 4천~5천장의 우편물이다. 미국 서부는 물론 동부인 뉴욕, 플로리다까지 보냈다. "효과가 금방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반응이 왔습니다." 미국 의사들이 "작품이 잘 됐다. 환자도 만족한다"는 편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미국은 오후 5시에 보내면 미국 전역에 이튿날 오전 10시에 병원 사무실에 배달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지역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일단 그에게 작품을 맡긴 의사는 대부분 만족하고 거래를 계속했다. "미국 의사들이 유난히 어렵고 까다로운 주문을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현재 그는 3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연간 36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국보다 기회는 많지만, 그 기회도 아이디어와 기술이 결부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경영도 주먹구구식으로는 절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는 일찍부터 마케팅, 제작, 홍보 등 업무를 모두 그래프화하는 경영 컨설팅을 도입했다.

방학이 되면 20여 명의 후배들에게 견학투어를 시키고 있다. 2명에게는 두 달간 직접 근무도 시킨다. "새로운 기술과 경험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죠." 가장 필요한 것이 의사소통 능력이다. 직접 사무실에서 근무해 보면 영어의 필요성이 몸으로 느껴진다.

"열심히 공부해라, 국내에만 있지 말고 외국에 나가 자극을 받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는 재미 대구보건대 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20여 명의 과 동문들이 함께 한다. 모든 과를 통합한 동문회를 만들기 위해 세 차례나 신문 광고를 내는 등 모교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두 딸도 모두 치과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큰 딸(하연하)은 오하이오주에서 치과의사 수련의 과정 중이고, 둘째(하이얀)는 뉴욕에서 치과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치기공은 의학이면서 예술 작품입니다." 사람의 입속에 자연스럽게 정착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것이 생명이다. 그는 정밀한 기술에 예술 작품을 만드는 혼을 불어넣고 있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프로 정신이죠."

산타아나에서 김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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