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면 '병' 잘못 풀면 '죄'…분노의 시대 살아남기

입력 2009-03-07 06:00:00

분노의 시대다.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지갑은 자꾸 쪼그라든다. 취업의 꿈은 접은 지 오래이고, 직장은 언제 문을 닫을지 몰라 속을 끓인다. 살림살이는 나아질 기미가 없는데 팍팍한 현실은 벗어날 길이 없다. 사회가 흔들리니 분노 지수는 올라간다. 너도 나도 예민하니 주먹이 앞서는 경우도 더 흔해졌다. 참으면 '병'이 되고, 잘못 풀면 '죄'가 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분노, 어떻게 풀어야 할까.

◆화가 치미니 주먹이 오간다

직장인 이모(51)씨는 악몽 같던 그날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야근을 마치고 퇴근했던 어느 날 저녁, 친정으로 데리러 오라는 아내의 전화가 신경을 긁었다. 희망퇴직 문제로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섰던 터라 짜증이 치밀었던 것. 막히는 도로에서 경적을 울리며 투덜대던 이씨는 대충 차선을 바꿨다. 순간, '빠직'거리는 기분 나쁜 진동과 소리가 들려왔다. 옆 차선에 있던 차가 이씨 차의 오른쪽 휀더를 받았던 것. 뒤차 운전자는 다짜고짜 뛰어와 창문을 두드리며 욕설을 퍼부었고, 이씨는 문을 박차고 내려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씨는 "내 잘못이 큰데도 짜증스럽던 기분에 욕설까지 들으니 분노가 폭발했다"며 "주변에서 말리지 않았으면 주먹다짐까지 벌일 뻔했다"고 푸념했다.

분노가 치솟으면 말보다 주먹이 앞서게 마련이다. 사회의 분노 지수가 오를수록 폭력 사건은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대구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5대 범죄 중 폭력 사건 발생 건수는 1만7천216건으로 2007년 1만6천294건에 비해 5.4% 늘어났다. 2004년에서 2006년까지 1만5천700여건 수준에서 오르락내리락했던 것에 비하면 최근 들어 오름세가 확연하다.

◆분노가 왜 커지고 있을까

분노의 자양분은 양극화다. 사회적·경제적 양극화는 일상 생활에서 빈번하게 생겨나는 순간적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게 만든다. 스트레스 수준이 높아지면서 분노를 경험하는 빈도가 늘고, 신빈곤층으로 전락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진다. 연쇄살인마 강호순이나 부녀자 납치범 정승희도 박탈감에 따른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 쏟아낸 경우다. 특히 분노 조절 능력이 약한 이들을 더욱 사회에서 멀어지게 할 수밖에 없다. 마음속에 가득한 소외감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행동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막장드라마'들도 분노감을 전염시키는 데 영향을 끼친다. '아내의 유혹', '꽃보다 남자', '에덴의 동쪽', '사랑해 울지마' 등 인기 드라마들은 방영시간 내내 비난과 울분, 복수, 눈물, 갈등을 줄기차게 쏟아낸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소리를 지르고, 남편은 아내에게 독설을 퍼붓는다. 분노에 가득찬 선배는 후배를 두들긴다. 어디에서도 용서와 사랑은 찾아보기 힘들다. 결국 울고 싸우고 소리지르는 자극적인 장면만 머리에 남게 된다. 성한기 대구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는 "정서적으로 불안할 때 분노와 울분 등 강하고 뚜렷한 정서는 더욱 뇌리에 깊이 남는다"며 "사회가 흔들릴 때 TV에서 쏟아내는 분노의 감정과 공격성은 쉽게 모방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분노 조절 능력이 과거에 비해 떨어지고 있는 것도 이유로 꼽힌다. 과거 대가족을 이루고 살던 때에는 가정에서부터 분노와 욕구를 참고 관리하는 교육을 자연스레 받았다.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이다. 집 안의 모든 가족이 한데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어른이 먼저 숟가락 들기를 기다리고, 먹고 싶은 반찬도 참아가면서 욕구를 자제하는 훈련과 기본적인 예절을 교육받았다는 것. 핵가족 시대에 새벽부터 밤까지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요즘 아이들은 그런 교육을 받을 여유가 없다. 젊은 부모들도 '아이의 기를 죽인다'는 이유로 방임하기 때문에 스트레스 상황에서 스스로 통제하는 훈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노는 심신을 잠식한다

분노는 몸과 마음에 악영향을 미친다. 분노를 느끼면 온몸의 자율신경들이 극도로 긴장하기 시작한다. 이성은 마비되고 상대에 대해 공격적으로 돌변하기 위해서다. 동공이 커지고 호흡과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주먹과 근육에는 힘이 들어간다. 이런 상태가 반복되면 심장이나 뇌혈관에 이상이 있을 경우 돌연사를 할 수도 있다. '미국 심장학회 저널(Journal of the American College of Cardiology)' 최신호에 따르면 분노와 강한 감정적 격분이 심장 박동수에 영향을 줘 사망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극도의 긴장상태가 유지되기 때문에 혈압을 올리고 소화불량, 속쓰림, 두통 등을 수반한다. 다혈질인 사람이 협심증, 심근경색증, 위십이지장 궤양, 소화불량증 등에 2, 3배 많이 걸리는 이유다.

그렇다고 분노를 마냥 참아서도 안된다. 한두 차례 겪는 분노라도 자꾸 참다 보면 분노가 재생산되는 결과를 낳는다. 억울함이나 분노를 마음에 담고 있으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부당하고 억울한 것으로 기억하게 된다는 것. 분노는 저절로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쌓아둔 분노는 결국 화병을 일으킨다.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속에서 치밀어 오르며 목에 걸린 느낌이 나타나고 얼굴과 머리에서 뜨거운 기운을 느낀다. 사소한 일에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불면증과 두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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