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書속에 묻어 있는 낡은 흔적들 옛 선비의 정신 그대로 배어나와
해마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3월이면 책가방 가득 새 교과서를 받아 힘겹게 들고 오던 초등학교 적 기억이 새삼스럽다. 묵직한 책들을 방바닥 가득 부려놓고 해 지난 달력의 뒷면으로 한 권 한 권 정성 들여 꺼풀을 입히던 때. 아무도 그렇게 하라 시키지 않았지만 모두들 책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읽을 거리가 그리 흔치 않았던 시절, 새로 받은 책에 실린 이야기와 시를 미리 읽어 보며 마음 설레던 일은 새 학년 시작될 즈음마다 엇비슷하게 경험했던 우리 또래들의 즐거운 추억담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책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학문을 존중하던 유교적 전통과 오래된 문치주의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실제로 조선에서 책은 교양과 도덕, 학문을 쌓는 일에서 뿐 아니라 왕조의 통치 이념을 전파하는 중요한 매체였다.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을 교화하고 충, 효로 압축되는 유교적 왕조 체제 유지를 위해 한글로 풀고 그림을 그려 넣은 수천 부에 달하는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 등을 간행해 전국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왕이 책 편찬에 직접 관여하고 밤 새워 교정을 보기도 하였으며, 당시 문화적 선진국이던 중국을 통해 책을 구입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책이야말로 정보와 지식의 보고였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책까지도 일일이 파악하여 유교적 통치 이념에 위배되는 책들은 철저히 유통을 금지시키고 불살라 버리기까지 했다. 권력자가 정보와 지식을 독점하던 시대, 책을 편찬'구입하고 통제'검증하는 일이야말로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며 권력을 장악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큼 오래된 출판 문화를 가진 나라가 드물다. 전통 한지의 우수한 지질과 인쇄술의 발달은 양질의 책을 생산해 내는 최고의 출판 선진국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앞선 금속활자 발명이라든가, 중국에서조차 중요한 서류나 책을 인쇄하는 일에 고려 종이를 수입해서 썼다는 기록은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우연한 계기로 고서 경매전에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애서가들 속에 섞여 옛 책들을 구경했다. 치자물 들인 두꺼운 표지와 명주실로 정성스럽게 묶어 장정한 책들, 수 없이 반복해 넘겨 읽느라 닳고 닳아 보푸라기가 이는 책장, 수십 번 공부하며 중요한 대목마다 먹으로 표시한 흔적들, 후각을 자극하는 오래된 책 냄새에서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출판 선진국이었기에 우리나라만큼 수백 년 된 옛 책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는 나라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다양한 고 활자본의 책들과 밤 새워가며 정성껏 베껴 썼을 필사본 책들이 우리나라만큼 헐값으로 팔리는 나라도 없다고 한다.
書癡(서치)니 書淫(서음)이니 書癖(서벽)이니 하는 그럴듯한 이름들은 책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강했던 옛 선비들의 면모를 한 마디로 보여주는 말들이다. 또한 애서가와 장서광들에 대한 조롱 섞인 표현이며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책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으며 세계는 하나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시인은 노래했다.
책은 귀중한 정신 문화 유산이다. 저자의 세계관과 삶에 대한 통찰을 담고 내 눈앞에 가득 놓여있던 오래된 책들, 각각의 책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신과 육체로까지 승격되어 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고서에 관한 한 영남 선비의 면모를 이어온 대구가 중심이 되고 있다고 한다. 옛 책들이 뿜어내는 무거운 향기, 일제히 朗唱(낭창)하고 和唱(화창)하고 있을 것 같은 환청에 이끌려 다시 한 번 봉산 문화거리로 나가볼까 한다.
옛 선비들은 경상 앞에 앉아 의관을 정제하고 책을 읽었다. 출판물 홍수의 시대라 그런지 예전처럼 책에 대해 소중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드문 것 같다.
서 영 처(시인)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