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상해 교통사고, 보험 가입해도 처벌

입력 2009-02-27 09:01:23

종합보험에 가입한 운전자가 교통사고로 피해자에게 중상해를 입혔더라도 음주운전, 뺑소니 등 중대과실이 없으면 형사책임을 면하도록 한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조항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옴에 따라 교통사고 전과자가 양산될 전망이다.

헌재 전원재판부는 26일 교통사고 피해자 조모씨 등 3명이 "종합보험에 가입한 운전자는 큰 사고를 내도 아예 기소하지 못하게 한 조항은 평등권과 재판절차진술권 등을 침해한다"며 낸 헌법소원에 대해 7대 2로 청구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조씨 등은 교통사고로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고 사고후유증으로 인한 학업중단과 뇌손상으로 인한 안면마비 등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됐음에도, 검찰에서 가해자가 종합보험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내리자 지난해 1월말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중상해 교통사고 경우 발생 경위, 피해자 과실 등을 살펴 정식기소, 약식기소, 기소유예 등 다양한 처분이 가능하고, 피해자 재판절차진술권을 보장해야 함에도 종합보험 등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면책되게 한 것은 기본권 침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종합보험 가입 운전자가 중대과실 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중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 공소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한 교통사고처리특례법 4조 1항은 판결일인 26일부터 효력을 상실하게 됐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26일 헌법재판소가 종합보험 가입 운전자라 하더라도 중상해 사고를 냈을 때는 원칙적으로 형사책임을 지도록 한 결정은 교통사고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교통 안전 관련 법제를 재정비하는 획기적인 판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이번 결정은 운전자들의 안전 의식을 높이는 계기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장 교통사고를 처리해야 하는 경찰로서는 '중상해'에 대한 기준이 모호해 관련법 제·개정 때까지 형사처벌 여부에 적잖은 부담을 안게 되는 등 혼란이 불가피하게 됐다.

◆교통사고 피해자 보호 강화됐다

헌재는 26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이하 교특법) 조항에 대한 위헌결정을 내리면서 "이런 면책조항은 선진국에서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자칫 안전주의 의무를 태만히 하기 쉽고 사고 처리를 보험사에만 맡기는 풍조가 있다"며 "교통사고로 피해자가 식물인간이 되거나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경우 사망사고보다 불법성이 결코 작지 않은데 면책조항을 그대로 두면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중상해 사고 운전자의 형사책임 면책을 규정한 교특법 조항은 그동안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1981년 제정된 교특법 4조 1항은 '업무상 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피해자가 중상해를 입어도 뺑소니·음주운전·과속 등 12개 유형에 해당되지 않는 한 검사가 기소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교특법이 피해자가 식물인간이 되거나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경우에도 법·제도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등 가해자 보호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중상해 사고시에도 운전자가 형사처벌을 받지 않음으로써 안전운전 의식을 떨어뜨리고, 피해자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나 합의를 외면하는 물질만능주의를 조장한다는 부작용도 제기돼왔다.

손해보험협회 측은 "이번 위헌 결정으로 교통사고 피해자 보호 및 안전운전 의식을 강화시킴으로써 교통선진국으로 첫발을 내딛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경찰 측에서도 "형사처벌이 가능해짐으로써 영업용 택시 등의 난폭 운전이 크게 사라지게 될 것 같다"며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중상해 기준 등 관련 법제 손질 뒤따라야

그러나 헌재의 이번 교특법 위헌 결정에 따른 숙제는 만만찮아 보인다.

경찰로서는 교통사고 가해자 중 형사처벌 대상이 대폭 증가해 업무 부담이 늘게 된데다, 형사처벌 여부의 기준이 되는 교특법상 '중상해'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어 당분간 현실적인 어려움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교통사고처리 업무를 담당하는 한 경찰관은 "앞으로 교통사고 가·피해자 간 합의 여부나 병원 진단서에 따라 형사처벌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등 업무가 늘게 됐다"며 "더욱이 '중상해' 규정이 모호하다보니 어느 정도 상해를 입혀야 처벌할지 판단이 쉽지 않다"고 했다.

교특법은 중상해에 대해 '신체 상해로 인해 생명에 대한 위험이 발생하거나 불구 또는 불치, 난치의 병에 이르게 된 경우'라고 할 뿐 '몇 주 진단'식으로 표시하고 있지 않다.

다만 손해보험사 등에서는 8~10주를 중상해 사고로 보고 있으나, 경찰이 벌점 부과 기준으로 삼는 도로교통법상에는 3주 이상을 '중상'으로 분류하는 등 관련 기준이 불명확하다. 또 다른 경찰관은 "교통사고 후유증에 의한 불구, 불치는 장기간이 지나야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미리 예측해 형사처벌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어려움이 따른다"며 "중상해 기준이 모호하게 되면 교통사고 전과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위헌 결정의 적용 시간도 혼동의 여지가 있다. 헌재 결정문은 '교특법 4조 1항은 오늘(26일)부터 효력을 상실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헌재법도 '위헌 결정이 있는 날로부터 효력을 상실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26일 0시' 이후부터 효력이 생기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 경우 선고가 난 오후 2시 이전 사건에까지 적용돼 소급적용을 금한 형법과 충돌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선고시(時)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헌재는 "법 해석과 적용은 소추기관인 검찰·경찰과 법원의 몫"이라는 입장이어서 교특법 제·개정에 앞서 유예기간을 두고 일정기간 홍보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손해보험 업계도 남몰래 속앓이를 하고 있다. 대구 한 손해보험사 보상담당 관계자는 "중상해 운전자들의 형사책임 면책 조항이 사라지면 사고가 줄어들고 보험금 지급도 줄 것으로 기대된다"면서도 "운전자들이 면책 규정 때문에 종합보험에 가입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이런 혜택이 없으면 종합보험 가입률(현재 88%)이 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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