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10년 전인 1999년. IMF 위기는 내 오랜 밥벌이였던 건축사업을 단숨에 끊었다. 20년 가까이 해오던 일이라 해도 부질없었다. 작지만 만족스러웠던 사업의 부도는 5천만원의 빚을 안겼다. 하지만 '가정'은 신비한 힘을 가진 곳이었다. 가족들의 믿음과 격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열심히 일했다. 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처자식들의 눈망울을 예사로 볼 수 없었다. 그후 10년이 지난 지금 IMF 위기 때의 어려움은 차라리 나았다. 나만 힘들면 됐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온가족이 힘들다. 10년 새 금쪽같은 아이 둘이 더 생겼지만, 어린 것들이 투병하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김시동(45)씨는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작은딸(7)과 뇌병변으로 치료중인 아들(6)에 대해 한참을 얘기한 뒤였다. 작은딸 아현이는 자가세포 이식수술을 앞두고 지난 달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한 터였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뇌병변 1급 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 수현이는 재롱을 떨었다.
"설상가상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요."
1999년 사업 부도 이후 김씨는 경험도 없는 염색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4년을 가지 못해 다니던 공장이 부도났다. 어렵게 구한 또 다른 염색공장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대구의 염색공장 연쇄부도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06년에도 마찬가지. 1년도 안 돼 공장이 부도를 맞았다. 7년 새 그의 일터만 3곳.
2007년에 다시 잡은 일자리는 뜻하지 않은 이유로 손을 놓게 됐다. 지난해 5월 말 아현이의 병, '부신 신경모세포종'을 알게되면서였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다리가 아프다는 딸을 안고 여러 정형외과에서 진찰을 받았어요. '이상 없다'는 소견을 내놓더라고요. 믿었지요. 한달 만에 겨우 걸을 수 있게 돼 안심하고 있었는데 아이 얼굴이 조금씩 하얗게 변하는 게 보였어요. 큰 병원으로 갔지요."
정형외과를 전전하는 통에 병세를 일찌감치 알아채지 못했다. 신경모세포종에 의한 백혈병. 모든 게 급박했다. 여기저기 도움의 손길을 구했다. 지난해 8월에는 한 공중파 TV프로그램에 출연, 병원비를 2천만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김씨는 이 때문에 하던 일을 그만둬야 했다. 뇌병변 1급 장애를 가진 수현이를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현이에게 뇌병변 1급 장애가 있다는 건 돌 즈음에 알게 됐다. 수현이의 엄마는 물리치료와 재활치료를 위해 줄곧 병원에 다녀야 했다. 수현이에게 더 신경을 쓰면 될 줄 알았던 부부.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아이들의 병을 간호하기 위한 '기러기 부부' 신세가 시작됐다. '이웃사랑 취재진'이 찾은 23일에도 백혈병에 걸린 일곱살짜리 딸은 엄마가, 뇌병변으로 자유롭지 못한 여섯살짜리 아들은 아빠가 각기 서울과 대구에서 돌보고 있었다.
"의료비 부담이 크진 않아요. 아현이처럼 소아암을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 연간 1천만원씩 보조해주는 제도가 있긴 하거든요. 그래서 의료비는 큰 부담이 없는데… 아픈 아이를 돌본다고 같이 사는 장모님과 큰딸을 제대로 못 보살피는 게 더 미안하네요."
노환까지 겹친 김씨의 장모(69·여)도 청각 2급 장애인으로 큰딸(15)의 끼니를 책임지고 있을 뿐 집에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 여섯 식구의 생계가 늘 걱정이라고 했다. 이들 가족이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돈은 생계급여 86만여원과 장애수당, 장애아 보육수당 36만원을 더한 122만여원. 하지만 한달간 이들 가족이 식재료 구입비로 쓰는 돈은 30만원이 채 안 됐다. 한달에 세번씩 아현이는 서울로 검진을 받으러 가야 하는데 왕복 이동비만 15만원이 든다. 서울에서 체류하는 비용까지 합치면 한달에 50만원을 족히 넘었다.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어 관리비가 적게 든다지만 월세, 전기료, 수도료, 통신비 등을 합하면 20만원으로는 어림없다. 수현이의 이동을 위해 구입한 LPG 차량 유지에도 월 20만원. 결국 30만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처지였다. 때문에 중2가 되는 큰딸은 학원에 다녀보는 게 꿈일 정도다. 아픈 아이를 위해 일을 그만뒀지만 건강한 아이가 피폐해지고 있다는 게 가슴 아프다는 김씨.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고, 아는 사람도 많아 얼굴이 알려지는 게 부끄럽지만 아이들에게 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는 그럴 일이 아니지요."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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