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 문화] 박물관 100년, 총독부박물관

입력 2009-02-21 06:00:00

"미술본관의 계단 아래 중앙에는 경주 남산의 석불을 안치하였고 계단 좌우에는 경주 감산사터 석불 2구를 배열하였는데 이는 당 개원 7년에 조각된 것이며, 계단 아래 중앙의 좌우 양쪽 벽에는 경주 석굴암의 불상 14구를 등신대(等身大)로 석고모형한 것을 붙여 놓았고, 천장에는 천인을 그려놓았으며, 또 미술관 앞의 광장에는 강원도 원주지방의 폐사지에 있던 현묘화상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좌우로 석불 및 철불을 배치하였다."

이것은 일본에서 발행된 '고고학잡지' 1915년 11월호에 수록된 조선물산공진회미술관 탐방기의 일부이다.

조선물산공진회는 1915년 가을에 식민통치자들이 그들의 5년간 치적을 자랑하기 위해 경복궁에서 벌인 대규모 박람회이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행사를 핑계로 기존의 전각들을 마구 헐어내고 그 자리에 가건물 형태의 진열공간들을 새로 건립하였는데, 예외적으로 유일한 반영구적인 서양식 건물로 지어올린 것이 바로 공진회미술관이었다.

흔히 동궁(東宮)이라고 부르던 왕세자의 공간을 헤집고 그 터에 들어선 공진회미술관은 조선물산공진회가 막을 내리자마자 한달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그해 12월 1일부터 박물관으로 곧장 전환하여 정식개관하였으니, 이것이 곧 '조선총독부박물관(朝鮮總督府博物館)'이다.

여기에는 일제 초기에 실시된 금석문조사사업을 통해 수집된 탁본류와 비편을 비롯하여 조선물산공진회 당시에 야외전시구역에 배치할 목적으로 전국 각처에서 수집한 석탑, 석불, 철불, 부도, 비석 등이 그대로 이관되어 초기수장품목록을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10년대 후반기부터 본격 시행된 고적조사사업의 결과로 고분출토품과 취기유물들이 지속적으로 모여들어 박물관의 수장고를 하나씩 채워나갔던 것이다.

더구나 총독부박물관은 조선총독부청사 구역을 제외한 경복궁 전체를 차지하여 이것을 모두 박물관의 용도로 사용하였는데, 근정전, 사정전, 수정전과 같은 전각들이 한결같이 박물관 전시공간으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이러한 형편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총독부박물관의 역사에는 문화재수난사는 물론이고 궁궐수난사까지 고스란히 곁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2009년 올해는 '한국 박물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는 1909년 11월 1일 대한제국 궁내부에 의해 창경궁에 들어선 '어원박물관(御苑博物館)'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근대박물관의 시초가 비록 '어원박물관'에 있는 것일지라도 그 뼈대는 사실상 1915년 12월 1일에 발족한 '총독부박물관'에 두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으뜸 박물관인 국립중앙박물관이란 것 자체가 해방 직후에 '국립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재출범한 것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이 총독부박물관에 그대로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박물관 100년이란 것에는 단지 경축의 대상이 되는 역사뿐만이 아니라 의당 혹독한 고난의 세월도 함께 녹아있다는 점도 꼭 되새길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나저나 박물관 100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지난해에 이어 금년에도 전국의 국립박물관과 미술관에 대해 무료입장정책을 그대로 실시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박물관을 가까이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싶다. 주변에 국립박물관이 있다면, 그저 나들이 삼아 자주 '공짜구경'을 둘러보고 오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저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박물관은 그저 죽은 이들이 남긴 유물들의 공동묘지에 불과한 곳일 수도, 아니면 그보다 더한 아주 근사한 문화공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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