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 바로 옆집에 있었다…용감한 시민들

입력 2009-02-21 06:00:00

#1. 지난 4일 밤 인천의 한 지하철 역. 만취한 50대 취객이 선로에 떨어졌다.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벨이 울리는 급박한 순간이었다. 이를 본 시민 두 명과 공익요원이 망설임 없이 선로로 뛰어들었다. 주변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모두 힘을 모아 취객을 끌어올렸다. 시민 한 명은 119 구급대가 도착해 취객을 옮길 때까지 그 곁을 지켰다. 취객 김모씨는 머리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다.

#2. 지난달 15일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 한파가 몰아닥친 이날 강 위로 US에어웨이 소속 여객기가 내려앉는 비상상황이 벌어졌다. 여객기는 라과디어공항을 이륙한 직후 새떼가 엔진에 빨려들어가면서 고장을 일으켰다. 급박한 상황에서 기장 체슬린 설렌버거는 침착하게 수상 불시착을 성공시켰다. 승객 155명과 승무원 전원 무사했다. 사람들은 이를 '허드슨강의 기적'으로 부르며 설렌버거 기장의 결단과 용기를 칭송했다.

영웅이란 슈퍼맨, 배트맨처럼 영화나 만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신화나 역사 속의 영웅만 있는 것도 아니다.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야만 영웅이 되는 것도 아니다. 크고 작은 사건·사고 속에서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 일생을 변화시키는 큰 힘을 발휘하는 작은 영웅들이 우리 주위에 많다. 작지만 너무도 큰 의미를 지니는 '인생의 작은 영웅'들을 찾아본다.

◆용감한 시민들

지난달 26일 제주에서는 새벽 청소 중이던 환경미화원 김규완(52)·박대영(42)·강창훈(37)씨 등 3명이 격투 끝에 맨손으로 강도를 붙잡았다. 강도는 설 명절인 이날 새벽 한 원룸에 침입해 한 여성의 얼굴을 수차례 때리고 114만원이 든 지갑을 빼앗아 달아나던 중이었다. 김씨는 격투 과정에서 어깨를 다치기도 했다. 전날 오후 10시부터 밤샘 특별근무 중이던 이들은 사건 해결 뒤에도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지난해 3월 부산에서는 중학생 9명과 초등학생 3명이 강도를 잡아 화제가 됐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이들은 빈집에 들어가 금품을 훔쳐 나오다 집주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달아나던 강도 용의자를 500m 정도 쫓아갔다. 학생들은 "강도를 잡아야겠다는 마음 때문에 무섭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다"고 밝혔다.

지난 2005년 11월에는 대구 지하철 2호선 경대병원역에서 사월 방면으로 운행하던 전동차 안에서 방화를 시도하던 김모씨를 3명의 고교생과 소방관이 격투 끝에 붙잡았다.

지난해 12월 8일 있었던 제1회 '2008 올해의 시민 영웅 시상식' 수상자의 영웅담도 있다. 회사원 이현필(30)씨는 지난해 9월 투신자살을 시도하던 30대 여성이 건물 8층에서 추락하는 것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사람은 살렸지만 본인은 구조 과정에서 오른쪽 팔과 다리가 부러지는 큰 상처를 입었다. 장혜린(20·여)씨는 지난해 3월 경기도 일산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성폭행범에게 끌려가는 초등학생을 구했다. 범인의 이상한 행동을 눈여겨보았다가 학생이 살려달라며 비명을 지르자 맨발로 뛰어나가 학생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택시기사 임영태(52)씨는 물에 빠진 여중생을 구했다. 힘들게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한동안 폐결절 증상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날 수상자 중에는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 고(故) 이궁열 목사는 지난해 6월 고속도로에서 벌어진 연쇄추돌 사고 현장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 마지막 추돌에 의해 튕겨나온 차량과 충돌해 사망했다. 고(故) 유현상 의용소방대원과 고(故) 최한기씨 등은 하천에서 위험을 당한 사람을 구하는 과정에서 익사했다. 지난해 1월 경북 칠곡군 왜관신협 남부지소에 근무하던 도모씨는 사무실에 침입한 강도에게 맞섰다가 강도가 휘두른 흉기에 복부를 여러 차례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도씨의 유족들은 보상금 가운데 1억원을 사회에 내놓아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시민 영웅'은 갖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정신과 용감한 시민정신을 발휘하여 타인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함으로써 사회에 가슴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 대부분 가정주부나 회사원, 대학생, 택시기사 등 우리 주변의 지극히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가족은 나의 힘

출생부터 평생의 연으로 이어지는 가족 구성원 중에 영웅으로 비치는 경우도 있다. 일종의 '역할 모델'(role model)인 셈이다. 네이버에 있는 리바이스 뉴501의 공식 브랜드 카페(cafe.naver.com/new501.cafe)의 한 게시판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영웅이라는 이야기가 다양하게 올라와 있다. 대화명 '포도봉봉'은 "인생의 선배로서, 제가 항상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마다 해답을 주기보다는 항상 지혜롭게 그 갈림길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던 분"이라면서 아버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정년퇴직 후 카드 돌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 아버지에게서 다시 한 번 영웅의 모습을 확인했다고.

흑인 혼혈인으로 미국 NFL 스타인 하인스 워드는 힘겨웠던 삶 속에서 뒷바라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자신의 공을 돌렸다. 그는 "풋볼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 어머니는 내가 나를 이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다"며 "엄마는 포기를 몰랐고, 슈퍼볼 승리도 나와 어머니가 함께 이긴 것"이라고 했다.

배우 박정자씨는 자신의 오빠(2006년 타계한 영화감독 박상호)를 영웅으로 꼽는다. 자신이 네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여동생만 4명인 집에서 실질적인 가장 역을 맡았던 오빠였다. 삼대 독자로 조숙했던 데다 예술적 감성과 재능을 함께 갖춘 오빠의 영향으로 박씨는 결국 연극배우로서의 삶을 살게 됐다.

◆나만의 특별한 영웅들

김모(31·여)씨는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학과 선배인 장모씨를 떠올렸다. 집에서 나와 독립을 하고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 정신적·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 이후에도 선배를 통해 조언도 얻고 지지를 받은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김씨는 자신의 결혼 청첩장을 보내면서 이와 같은 사연을 직접 손으로 적어서 장씨에게 건넸다. 20대 직장인 정모씨에게도 학교 선배가 영웅상이다. 그 선배는 학과 대표도 맡는 등 학과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선·후배는 물론 교수들과의 관계도 대단히 좋았다. 정씨는 "그 선배를 보며 '원활한 인간관계는 바로 저렇게 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학교 일도 마치 자신의 일처럼 흥겨이 하는 모습을 보고 여간 부럽지 않았다고.

김잔디(30·여)씨는 얼굴도 알 수 없는 트럭 운전기사가 자신의 영웅이다. 김씨는 아주 어릴 때인 두살 때 밖에서 놀다 하수구에 빠진 적이 없다. 까딱하다간 목숨도 잃을 뻔한 순간에 한 트럭 운전기사가 나타나 김씨를 구출하고는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주변에서 들은 얘기를 통해 한 번씩 그때를 떠올린다. 남들보다 일찍(?)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현대에는 영웅이란 것이 스포츠 스타나 유명인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처럼 대중매체를 통해 만들어진 영웅보다는 비록 작고 초라하더라도 나 자신에게 소중한 이들이 오히려 더 큰 영웅이다. 미국의 뉴스전문채널 CNN의 '영웅들'(Heroes)이라는 프로그램 취지 또한 보통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펼치는 선행을 소개하는 것이다. 해마다 선정되는 10명의 뛰어난 봉사자 및 선행자들은 '자기희생'을 통해 타인에게 희망을 부여하는 사람들이다. "영웅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사람"이라는 로망 롤랑의 말대로 누구나 영웅이 될 수도 있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 용감한 시민상='타인의 어려움이나 자기와 관련 없는 일에 위험을 무릅쓰고 남을 도와준 경우'에 당사자에게 '용감한 시민상'을 준다. 지방자치단체나 경찰이 시상한다. '의로운 일로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인 경우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의사상자 심사위원회를 통해 의사상자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현재 500여명이 의사상자로 인정받았다. 이들에게는 의사상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최고 1억9천700만원의 보상금과 함께 의료급여 혜택이 제공된다. 남을 돕는 과정에서 파손된 개인 소유물에 대한 보상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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