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속의 현대인…당신의 라이벌은 누구입니까?

입력 2009-02-21 06:00:00

호적수, 맞수로 풀이되는 라이벌(rival)은 막상막하인 경쟁상태를 뜻한다. 역사뿐 아니라 소설, 영화, 만화에도 라이벌은 등장한다. 영화 '배트맨'에서는 배트맨와 조커가 선과 악을 대표하는 라이벌로 나타나지만 실상 역사 속의 라이벌들은 후세에 기록한 이가 누구냐에 따라 선과 악 또는 정의와 불의로 구분되는 경향이 짙었다. 사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당대에는 알 수도 없고, 또 그런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서로 목표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결국 승자에 의해 기록되는 역사 속에서 패자는 늘 '불의'였고 대중의 뜻을 저버린 역사 속의 반역자였다. 하지만 거창한 역사 속의 라이벌뿐 아니라 하루하루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일상에도 라이벌은 존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켜보는 이에게는 짜릿한 긴장감을 선사하지만 당사자들에게는 고단함의 연속이리라.

◆내 인생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가 없는 김연아의 경기는 비록 세계 정상에 올랐다는 기쁨 속에도 뭔가 빠진 듯 한풀 꺾인 느낌을 줄 것이다. 최근 열린 2009 호주 오픈 테니스대회 결승전이 더욱 빛난 이유도 종전까지 최장기 랭킹 1위를 달리던 로저 페더러와 현재 랭킹 1위인 라파엘 나달이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접전을 펼쳤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라이벌이 없어도 장미란과 이신바예바는 세계 기록 경신이라는 목표를 위해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 때문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함을 전해준다. 하지만 이들의 경기에 라이벌이 있다면 관중들에게는 선수 자신과의 경쟁보다 훨씬 아찔한 승부를 보여줄 기회를 주고, 기록 경신도 훨씬 쉬워지는 효과를 거둘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이건 운동선수건 인터뷰에서 라이벌 관계를 묻는 질문에는 쉽사리 답하지 못한다. 누군가를 경쟁상대로 인식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순간 그들의 관계는 좋건 싫건 도마 위에 올라서 일거수 일투족이 비교되기 때문이다. 내심 누군가와 경쟁하는 것은 몰라도 공개적으로 비교되는 것은 적잖은 부담이 따르기 마련이다. 최근 떠오르는 유행어 중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엄친딸'(엄마 친구 딸'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 단어 앞에는 우스개처럼 수식어가 붙는다. '전설 속에 존재한다는 엄친아', '현실 속에서 볼 수 없는 엄친딸' 등이다.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은 만능 스포츠맨인데다 성격까지 '쿨'하다니. 게다가 그 집에는 돈까지 많다면.

'젠장,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라지만 사실 우리는 늘 알게 모르게 비교된다. 직장인 배윤호(37)씨는 "회사 처음 들어왔을 때는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며 늘 붙어다니지만 연차가 쌓일수록 결국 가장 치열한 경쟁상대가 입사 동기임을 알게 되고, 차츰 거리를 두고 대하게 됐다"며 "엄친아, 엄친딸은 비교당할 때 잠시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지만 입사동기는 평생 부담"이라고 했다.

주부 겸 교사인 김모(40)씨는 동창 모임에 다녀오면 적잖게 속이 상한다.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엇비슷했던 친구가 있는데, 집안 형편이 다소 어려웠던 저는 사범대로, 친구는 의대로 진학했어요. 친구는 부부 의사인데 저희와는 사는 게 다르죠. 술 한 잔 마시고 '쟤는 나보다 공부 못했는데'라고 했더니 친구들이 '그러면 뭐하냐? 지금 의사인데'라며 핀잔을 주더군요." 하기야 인생은 아직 많이 남았으니 누가 이겼다, 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울러 이기고 지는 게 무슨 상관이랴. 그런데도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경쟁이 가져오는 결과

이건희(67) 전 삼성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41) 삼성전자 전무가 대상그룹 장녀인 임세령(32)씨와의 이혼소송에 휘말리면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삼성그룹이라는 세계적 브랜드 덕분에 이번 이혼소송의 결과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 뉴스가 될 전망. 천문학적인 금액을 요구한 재산분할의 결과와 이혼 사유도 관심거리지만 사실 그들의 결혼도 당시에는 엄청난 뉴스거리였다. 지난 1998년 조미료 업계 라이벌이던 '미풍'(삼성)과 '미원'(대상)의 결합인 동시에 영남기업(삼성)과 호남기업(대상)이 사돈지간이 됐기 때문.

이혼소송이 오가는 마당에 뜬금없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결혼 이유가 새삼 궁금해진다. 모르긴 해도 양가의 결합은 '경쟁에서 협력으로'를 표방하지 않았을까? 아직 구체적인 이혼 사유를 알 수 없지만 '협력'이 결혼과 사랑의 이유는 될 수 없어 보인다. 세상을 살다 보면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셰익스피어는 작품 '헨리 4세'에서 이런 유명한 대사를 남겼다. '승리한 자에게는 어떤 것도 부정하게 보이지 않는다.'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도 극한으로 치닫는 라이벌 관계가 관심을 증폭시킨다. 이기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는 신애리(김서형)와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구은재(장서희)는 마치 역사극 속에서나 봄직한 정적 관계를 연상시킬 정도다. 게다가 3월 중순쯤 진짜 민소희(채영인)가 등장해 가짜 민소희 역할을 하는 구은재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주부 남주은(37)씨는 "어처구니없는 스토리지만 힘이 없어 당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구은재의 복수는 대리만족을 주는 측면이 있다"며 "아울러 세상사가 드라마처럼 단순 명료하지는 않지만 어차피 옳고 그름보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경쟁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선의의 경쟁'이 필요할 뿐 경쟁 자체는 삶의 필수 요소라는 것. 미국의 심리학자인 알피 콘(Alfie Kohn)은 저서 '경쟁을 넘어서'(No Contest)를 통해 경쟁에 대한 본질적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경쟁 옹호론은 4개의 '신화'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경쟁은 삶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인간성'의 일부라는 것. 두번째 신화는 경쟁이 최선을 다하도록 만들며, 세번째는 즐거운 시간을 갖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제공하고, 네번째는 인격을 키우고 자신감을 얻는 데 좋다는 것. 하지만 알피 콘은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과연 경쟁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느냐는 근본적 물음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강변한다. 그는 '건전한 경쟁'이라는 용어도 모순 덩어리이며, 경쟁이 아닌 협력이야말로 인류가 궁극적으로 나아갈 방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알피 콘의 설파는 아직 힘을 얻기에 역부족으로 보인다. 세상은 경쟁만이 궁극적인 선이라고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배우니 말이다. 학교 시험을 치고 온 아이에게 엄마들이 묻는 순서는 하나같이 똑같다. "몇 개나 틀렸어?"→"너희 반에서 너보다 적게 틀린 사람이 몇 명이야?"→"네 친구 ○○는 몇 개 틀렸다고 해?"→"걔는 시험공부 많이 했데?" 그리고 이런 질문은 묻는 사람과 내용만 조금씩 달라질 뿐 평생을 따라다닌다. 동네 친구가 진학한 대학, 입사한 회사, 진급한 순서, 그리고 퇴직금 액수에 이르기까지….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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