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학문적 자존심'은 이미 '헌신짝'

입력 2009-02-21 06:00:00

고위공직자 인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 바로 '논문 표절'과 '논문 중복 게재'이다. 이번에는 '자기표절'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까지 등장했다.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논문 조작 의혹으로 한 차례 큰 충격을 겪었지만 여전히 논문을 둘러싼 의혹들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2006년 7월 김병준 당시 교육부총리, 같은 해 12월 이필상 고려대 총장, 지난해 2월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이 줄줄이 논문 표절 의혹을 받았다.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정진곤 교육과학문화수석은 중복 게재 의혹을 받았고, KAIST 김태국 교수는 세계적 학술지인 사이언스와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 2편의 조작이 드러나 국제적 망신을 사기도 했다. 이번에는 현인택 통일부장관 후보자는 논문 표절과 중복 게재 의혹을, 이달곤 행정안전부장관 후보자는 중복 게재 의혹을 받고 있다. 조작 의심을 받는 논문은 연간 600여건에 이른다고 한다. 왜 이런 일들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 것일까?

◆대학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표절 의혹

국가지정연구실을 운영하는 성균관대 김모 교수 연구팀이 발표했던 여러 편의 논문에 똑같은 실험사진이 쓰인 사실이 드러나며 '데이터를 조작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다. 게다가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 유명 저널에 실린 외국 연구팀의 논문을 상당 부분 그대로 베껴서 국내 저널에 발표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부산대 교수 2명과 경상대 교수 2명이 각각 논문을 표절했거나 중복 게재한 사실이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다.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이상민 의원(자유선진당)의 부산대 및 경상대에 대한 국정감사 질의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국내 대학에서 발생한 논문표절(논란) 사례는 모두 15건이고, 이 가운데 4건은 지난해와 올해 부산대와 경상대에서 발생했다는 것. 부산대의 경우 2007년 공대 모 교수가 제3자 논문을 표절한 책을 발간한 사실이 밝혀져 교수가 모든 책을 수거 및 폐기처분했으며, 지난해 부산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조사에서 사회대 모 교수는 자기 논문을 여러 학술지에 중복 게재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 경상대의 경우 사회대 모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자연대 모 교수는 지난해 논문의 중복게재 문제로 경고를 받았다는 것.

지난해 11월 충북 모 대학에서 경상대학 모 교수가 대학원생이 쓴 석사논문을 베껴 한 학술지에 실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교수는 서울지역 대학 모 교수와 함께 2007년 모 학술지에 '패밀리 레스토랑' 관련 논문을 실었는데, 확인 결과 서울 소재 대학 대학원생이 쓴 석사논문을 요약한 것이며, 제목과 본문의 통계치까지 똑같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교수는 2007년에도 다른 사람이 쓴 교재를 자신이 쓴 것처럼 속였다가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당한 적도 있다고 학교 측은 밝혔다.

지난해 12월에는 시간강사의 논문을 자신이 쓴 것처럼 발표해 승진심사 연구실적에 포함시킨 광주 모 대학 사회복지경영학과 모 부교수에 대해 벌금 300만원이 선고된 적도 있다. 이 교수는 전임강사 신분이던 2003년 말 같은 학과 시간강사가 작성한 논문 요약본을 건네받은 뒤 이듬해 제목 등을 바꿔서 자기 논문인 것처럼 속여 학회에 제출하는 등 논문 4편을 표절하거나 도용했다는 것. 조교수로 재직하던 2006년에는 도용한 논문을 자기 연구실적으로 속여 부교수 승진심사에 제출하기도 한 혐의도 받았다.

◆강도 높은 자정 노력 필요

지난해 10월에는 한국인 과학자들의 논문 4편을 포함한 수백편의 국내외 연구 논문이 대거 표절 의혹에 휘말리기도 했다. 영국 과학잡지 '네이처'가 "미국 텍사스대 연구팀이 자체 개발한 표절검색 프로그램으로 의학 관련 논문을 조사한 결과 183편이 표절로 나타났다"고 밝힌 것. '데자뷰'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논문에 쓰인 문장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검사한 결과다. 프로그램을 개발한 미국 텍사스대 해럴드 가너 교수는 "표절 의혹을 받은 논문들의 문장은 평균적으로 85%가 비슷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논문 표절과 중복 게재 등의 문제가 잇따르자 대학가에서도 강도 높은 자정 노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교육과학기술부가 대학과 학회,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내 연구윤리 활동 실태조사' 결과, 국내 대학 10곳 중 7곳 정도가 연구윤리 관련 규정을 두고 있다는 것. 2년 전에 비해 4배 이상 높은 수준으로, 연구윤리에 대한 인식이 크게 개선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지역 K대 이모 교수는 "논문 편수만 지나치게 중시해서 교수 개인과 대학, 연구기관의 순위를 매기는 분위기가 문제"라며 "연간 수천편씩 쏟아지는 논문의 표절과 중복 게재 여부를 일일이 확인하기 힘든 점은 인정하지만, 이런 맹점을 이용해 국가로부터 부당하게 예산 지원을 받는다면 그로 인해 상대적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도 대학과 평가기관이 알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학계 스스로 보다 높은 윤리적 기준을 세우고 지키지 않는 한 논문 의혹을 잠재울 수 없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대학원 박사과정인 박모(32)씨는 "지도 교수도 아니면서 석·박사 학위 논문에 공동 연구자로 이름을 올려달라는 학과 교수들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다"며 "실제로 일부 교수들은 논문 작성 과정에서 공공연히 다른 논문 데이터를 조금만 바꿔서 쓰라고 종용할 정도"라고 했다. 문제는 출처나 인용 여부조차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이 직접 모든 것을 연구한 것처럼 논문을 조작하는데 있다. 지역 대학 모 교수는 "최근 들어 논문 표절이나 조작이 크게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연간 제출해야 하는 연구 실적을 맞추려다보면 그런 유혹을 받는 것도 사실"이라며 "동종 업계에 몸담고 있다 보니 표절이나 조작 의혹이 드는 논문을 일일이 문제삼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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