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포커스] 남우식 푸르밀 사장

입력 2009-02-09 06:00:00

1970년대 최고 스타투수 기억나세요?

철없던 젊은 시절 야구가 인생의 전부였다. 눈뜨자마자 야구장을 찾았고, 잠들기 전까지 손에서 야구공을 놓지 않았다. 타고난 성실성에 천부적인 재능까지 더해져 경북고 시절에는 최고 고교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나타나면 오빠부대들이 구름같이 몰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야구계에서 사라졌고, 그로부터 30여년 후 혈기방장하던 이 젊은 투수는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어 한 중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올라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밀 남우식(57·사진) 사장. 푸르밀은 롯데우유의 새로운 이름으로 직원 360여명에 연 매출액 2천500억원을 올린다.

남 사장은 고교 야구가 인기를 끌던 1970년대 최고의 정통파 투수 스타 플레이어였다. 지금도 고교 야구계를 추억하는 올드 팬들의 머릿속에는 박철순, 선동열보다 '남우식'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71년 경북고는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까지 서울에서 열린 전국 대회를 모조리 석권했다. 대구의 문교부장관기, 부산의 쌍룡기 등 지방 대회도 경북고가 패자였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찾아볼 수 없는 대기록. 남 사장을 비롯 이선희, 황규봉, 배대웅, 천보성, 정현발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는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면 명찰을 가려야 했고, 동료들과 같이 대구에서 유명했던 '맘모스 빵집'에 들르면 앉아있는 테이블에 빵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를 끝까지 지켜주지 않았다. 고교 졸업 후 한양대에 진학한 남 사장은 중·고를 거치면서 어깨를 혹사당해 과거처럼 불 같은 강속구를 던지기 힘들게 됐다. 대학 졸업 후 실업팀이던 롯데에서 1년여 동안 투수로 활동했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1980년 야구를 그만뒀다.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코치를 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는 롯데햄우유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는 계산서가 뭔지도 잘 몰랐고, 마케팅 용어는 더더욱 생소했다. 야구계의 동료, 선·후배, 팬들을 밤낮 가리지 않고 찾아가 물건을 팔았다. 그는 "동정어린 눈빛으로 물건을 사주기도 했고, '동명이인 아니냐'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최고의 영업사원으로 성장했다. 회사에서는 실적이 제일 나쁜 지점에 남 사장을 내려보냈고, 1년 만에 최고의 실적으로 답했다. 남 사장의 능력을 인정한 회사는 그를 또 다른 시험대에 올렸다. 영업사원 14년 만에 관리직인 총무부장으로 발령을 낸 것. 그는 "하루에 3시간씩만 자면서 관리 분야의 서적을 뒤적이고, 강의를 듣고, 주변의 조언을 얻기도 했다"고 말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관리직에서도 인정을 받은 그는 입사 28년 만에 CEO 자리까지 올랐다.

그는 성공 비결에 대해 "정신력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했다"며 "야구 후배들도 강한 정신력으로 버티면 사회 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용기 있는 야구 후배를 기대했다. 그는 청년 시절의 추억이 곳곳에 녹아 있는 대구를 자주 찾아 지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곤 한다.

이창환기자 lc15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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