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를 채 1년도 남겨두지 못한 1909년 11월 1일, 창경궁 홍화문 앞으로 큰 구경거리를 만난 인파들이 몰려들었다. 우연찮게도 이보다 며칠 앞서 만주 하얼삔에서 한국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절명하는 바람에 당초 예정된 성대한 개장식은 함께 열리지 못하였으나, 이 안에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을 아우르는 어원(御苑)이 들어서 이날부터 일반 공개가 막 시작된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에게 흔히 '창경원(昌慶苑)'으로 기억되는 공간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벌써 100년 전의 일이다. 사람들은 창경원이라고 하면 대개 동물원을 먼저 연상하지만, 그 안에는 식물원도 있었고 또 박물관도 있었다. 그러니까 금년은 '한국 박물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당시 박물관은 별도의 건물을 짓지 않고 기존의 창경궁 명정전과 부속 회랑 및 부속 전각 등을 진열 공간으로 삼았다가 1911년에야 일본식 건물을 지어 이것을 박물관 본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별도의 명칭도 짓지 않고, '어원박물관', '궁내부박물관', '창덕궁박물관', '제실박물관'등으로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으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올해가 근대식 박물관이 등장한 지 100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기는 하더라도, 여기에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측면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이러한 박물관의 설치가 전적으로 대한제국 궁내부에 소속된 일본인 관리들에 의해 주도된 결과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1909년에 건립된 어원박물관을 우리 스스로 진정한 박물관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전해 듣고 있다.
알다시피 창경원이라는 것 자체가 순종 황제를 위한 휴식 공간으로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멀쩡한 궁궐을 파괴하면서까지 만들어진 것이었다. 또한 창경궁의 법전인 명정전을 박물관의 주요 전시공간으로 삼았다는 것은 이러한 측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아울러 박물관의 진열품 수집이라는 명분으로 다수의 일본인들이 도굴을 통해 획득한 고려자기와 불상 등을 다시 막대한 돈을 들여 사들여야 했던 점도 꽤나 고약했던 일로 지적된다. 어찌 보면 우리 나라 문화재의 수난사는 바로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인데, 어원박물관의 발족이 이것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는 형편인 것이다.
실제로 경주에 있던 신라옥적이 유물 수집을 이유로 서울로 옮겨지고, 경복궁 광화문과 남한산성 종각에 멀쩡하게 매달려 있는 흥천사 종과 천흥사 동종을 비롯하여 경기도 광주 하사창리에 있던 초대형 철불 등이 일본인 골동상의 손을 거쳐 잇달아 어원박물관으로 팔려나간 것은 모두 이 당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현재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반가상 역시 그 시절에 어원박물관으로 편입된 유물인데, 워낙 마구잡이로 유물 수집이 이뤄진 탓인지 그 출처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이렇게 출범한 '어원박물관'은 '이왕가박물관'이 되었다가, 1938년에는 덕수궁으로 옮겨지면서 '이왕가미술관'이 되었고, 다시 해방 이후에는 '덕수궁미술관'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가 1969년 5월에 국립박물관에 흡수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덕수궁미술관의 소장품들은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일괄 편입되었으니, 싫건 좋건 아직도 그 역사와 전통은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는 셈이다.
한국 박물관 100년을 맞이하여, 한번쯤 우리 문화재들이 겪어야 했던 길고도 고단했던 수난의 역사를 깊이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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