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대경인] NASA 고다드 우주항공센터 배윤열 책임연구원

입력 2009-02-06 06:00:00

▲ 배 연구원이 인공위성 발사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오른쪽 가슴에는
▲ 배 연구원이 인공위성 발사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의 오른쪽 가슴에는 "고향의 신문기자가 와서 처음 달았다"는 NASA 공로 금배지가 달려있다. 김중기기자

미국 메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을 찾아가는 길에는 눈발이 흩날렸다. 워싱턴 DC에서 30여 분 거리를 달려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의 고다드 우주항공센터 책임연구원 배윤열(73)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말쑥한 양복차림으로 고향에서 온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73세의 나이지만, 그는 여전히 미국 우주항공산업의 심장부인 NASA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다드 우주항공센터는 지난 1990년 NASA의 열일곱 번째로 설립된 산하 연구기관이다. 우주에서 보내온 각종 데이터를 분석하는 곳이다. 그의 임무는 NASA에서 발사되는 인공위성의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인공위성을 우주에 쏘아 올리기 전에 오작동 없이 제 역할을 하는지를 전체적으로 점검하는 일입니다." 인공위성의 제작단가는 평균 2천만 달러(한화 약 280억 원). 월 2~3개, 연간 30~35개의 인공위성이 발사된다. 이 모든 위성이 그가 최종 OK 사인을 해야 발사될 수 있다. 미국 뿐 아니라 일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미국의 스파이위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공위성이 그렇다. 현재 지구 궤도를 도는 대부분이 한국에서 온 동양인 과학자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그는 올해로 43년 째 NASA와 인연을 맺고 있다. 그가 관여한 인공위성만 해도 수백 개. 그러나 그가 책임지고 발사시킨 인공위성은 단 한 번도 오류를 발생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동양인으로 고령(?)이지만, 그가 퇴사하지 못하도록 NASA가 잡는 이유다.

그가 미국에 온 것은 1962년 9월. 김포에서 출발해 도쿄와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볼티모어를 거쳐 워싱턴DC에 도착하는 먼 여정이었다. "차들이 도로를 꽉 매운 것이 마치 파도처럼 물결쳤다"는 것이 그의 첫 미국 인상이다.

그러나 7개월 동안 사투 끝에 이룬 유학길이다. 그는 1959년 경북대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했고, 대구농고와 공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미국이란 나라가 어떤 곳인지 정말 가보고 싶었습니다. 거기서 공부도 실컷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터지고 외화유출을 엄격하게 단속했던 정부는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어 당시 유학길을 막았다. 여권, 국방부의 허가에 경비 제한, 교통편까지 모든 것이 벽이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꿈에 나올 정도"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그래도 큰 땅, 미국에 대한 호기심과 그곳에서 원 없이 공부해보고 싶다는 20대 젊은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워싱턴DC의 아메리칸 유니버시티 대학원에서 수학과 통계를 전공했다. 식당에서 그릇을 씻고, 양로원에서 청소를 하며 "실력이 아니라 악으로 공부했다." 동양인으로 당시 미연방 정부기관으로 미소 우주전쟁의 핵이었던 NASA에 들어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1966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NASA의 협력업체에 입사하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MIT와 칼텍(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등 유명 대학의 졸업생과 경쟁하면서 죽음 힘을 다해 일에 몰두했다. 워낙 세밀하고 철두철미했던 그의 보고서는 NASA 고위층까지 전달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그로부터 5년 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자 NASA가 정식입사를 제안했다. 1972년 미국 유학 10년 만에 그는 '한인 최초의 NASA인(人)'이 됐다.

그는 초중고와 대학을 모두 판잣집 가교사에서 공부했다. "전쟁이 끝난 후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죠. 해방이후 대구에 피아노가 4대 밖에 없던 참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대구 방천 옆에서 허름한 천막에서 공부를 했지만, 열정만은 남달랐다. 그 열정이 현재의 그를 만든 것이다.

그는 글로벌의 요건으로 삶의 태도를 얘기했다. "항상 사회와 국가에 공헌하며, 결코 빚지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모토. "돈과 재물은 결코 삶의 보람이 될 수 없습니다. 꿈도 '사람 관계'를 떠나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이민 2세들에게 기초과학과 수학을 가르치며 미래의 과학자를 양성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맑은 눈빛과 힘이 실린 말투에서 열정으로 가득찬 20대의 모습이 엿보였다.

가난한 나라에서 참으로 가난하게 공부했던 그가, 우주를 향한 원대한 꿈을 품고, 마침내 이룬 저력에는 그래도 잃어서는 안 되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 메릴랜드에서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