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자식은 웬수?

입력 2009-01-29 08:33:03

진료를 하다 보면 오늘처럼 기운 빠지고 곤혹스러운 경우가 더러 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이 낮은 잿빛 하늘만큼 대기실 분위기도 가라앉아 차분한 가운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유리잔 깨어지듯 날카롭게 들려온다. "저 원장, 전문의 맞아요?"

하루 전 눈썹 문신 제거시술을 받은 아가씨의 목소리였다. 사연은 이렇다. 한 달 전 동생이 다른 원장님께 문신 제거 레이저 시술을 받았는데 이렇게 딱지도 안 생기고 이만큼 아프지도 않았다는데, 여자 원장한테 시술받은 자기는 동생보다 더 아프고 상처도 심해 흉터가 생길 것 같다면서 여자 원장이 전문의 맞느냐는 것이었다. 진료실로 모셔 문신은 깊이에 따라 시술 후 반응이 다를 수 있으며 흉터는 안 생기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그런데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혹시 눈썹이 안 나거나 흉터가 생기면 책임지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한다. 재차 전문의가 맞는지 확인하면서 말이다.

환자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고 혼란스러웠다. 의사를 포함한 몇몇 직업군은 원천적으로 권위나 전문성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대단히 비참해진다. 그런 기분이 얼굴에도 나타났나 보다. 퇴근을 하니 아들이 엄마 얼굴이 어둡다며 안부를 묻는다. 주민증이 나와 성인이 됐다고 자랑하는 아들인지라 친구에게 얘기하듯 오늘 일어난 일을 푸념했다. 평소 나를 잘 이해하는 아들이 위로하길 "엄마는 실력도 있지만 환자의 마음을 잘 어루만지는 의사잖아요! 그 아가씨가 계속 엄마 진료를 받는다면 엄마를 바로 알고 오늘 일을 무척 미안해 할거예요."

이따금 연년생 아들 둘 때문에 지쳐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옛 어른들 말씀을 슬그머니 떠올릴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이 녀석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고 사는 나이가 되었다.

문득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의 귀국 독창회가 있는 날이었다. 수많은 청중이 그녀의 노래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제시간에 독창회를 시작하지 못하고 대신 신인 가수가 한 명이 등장했다. 그가 노래를 불렀지만 청중 누구하나 박수를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청중 사이에서 한 아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빠! 정말 최고였어요!" 순간 공연장 안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고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이 신인 가수가 바로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였다. 아들이 외친 격려의 한마디가 그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만들었다.

나 역시 훌쩍 커버린 아들의 말 한 마디에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얻은 것 같이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제는 누군가가 전문의 맞느냐고 취조하듯 물어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피부과 전문의라고….

053)253-0707, 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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